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다결 Oct 13. 2024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

레드 다이어리



   모든 인간관계는 신뢰를 기반으로 유지된다.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심지어 연예인과 팬의 관계마저도 신뢰가 중요하긴 매한가지다. 관계가 형성되는 순간, 그들은 함께 한 지난 추억과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그때 우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떤 유대감을 느꼈는지, 얼마나 행복했는지는 관계를 유지하기에 더없이 좋은 재료가 된다. 신뢰는 이렇게 장시간에 걸쳐 형성된다. 순간순간의 기억들이 켜켜이 쌓이고, 층을 이룬다. 즉, 그들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가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함께 만든 세계는 영원히 유지되기 어렵다.






   관계에서 찾아오는 시련은 이 세계를 찾아온 지진과 같다. 실수로 여길 수 있는 행동은 진도 3 밑에서 멈춘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웃어넘길 수만 있다면 이 정도 지진쯤이야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수 이상의 기만과 배신은 가볍게 진도 7을 뛰어넘는다. 땅이 흔들리는 것도 모자라서 여기저기 균열이 일어난다. 높은 장식장에 고이 넣어둔 추억마저도 강한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부서진다. 재난 경보가 울리고 몸을 숨겨도 피해를 막을 수 없다. 영겁 같던 시간이 지나가고 주위를 둘러보면 죄다 산산조각이 나 있고 사방이 폐허다. 허겁지겁 바닥에 떨어진 추억을 살펴보지만, 어느 것 하나 살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 관계는 끝이 난다. 분명 함께 만든 세계인데 나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나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나’라는 세계관을 함께 만든 사람들 말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과 끝까지 함께 가진 못했다. 너무 이른 때에 이별을 택한 엄마가 그러했고, 유머 코드는 잘 맞았으나 가치관은 맞지 않았던 친구가 그러했고, 대화보단 오해를 택해버린 누군가 등이 그러했다. 당신은 그러지 않겠지. 언제나 내 곁에서 함께 해주겠지. 생각했던 이들이 내게서 등을 돌리는 경험은 상상하기도 힘든 고통을 선사한다.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던 걸까. 무너진 신뢰에 대한 이유를 찾다 보면 남 탓만 늘어난다. 그를 미워해도 될 만한 이유를 수십 개씩 덧붙이며, 결국 사람 자체에 대한 불신이 커진다.




   한 번 재난 경보를 울린 관계는 쉽게 재건되지 못한다. 큰 지진 뒤에 몇 날 며칠이고 여진이 찾아오듯 지속적으로 고통에 시달린다. 의연하고도 말간 얼굴로 살아도 가슴 한구석은 작은 바람에도 놀라고, 울게 된다. 게다가 찾아오는 인간마다 사기꾼처럼 느껴지는지라, 자동으로 예민해지고 벽을 친다. 관계 단절을 부르는 것이다. 이렇듯 잘못된 관계의 부작용은 인간관계 전체에 회의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 사이에 신뢰는 더없이 중요하다. 붕괴된 하나의 관계가 나머지 관계까지 연쇄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서른을 넘긴 지금도 나의 인간관계는 그리 넓지 못하다. 몇 번이고 나를 무너뜨린 사람들을 떠올리며, 웃으며 다가온 사람들을 밀어낸 적도 많다. 그러나 참 신기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 곁에 있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다 필요 없으니 혼자 알아서 살겠다는 나를 꾸역꾸역 찾아와선 문을 두드린다. 그들은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다. 별 것 아닌 말을 가볍게 던지며 나를 문밖으로 끌어내고, 안으로 좁아지던 나의 세계를 더 넓힌다. 아직은 끝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신뢰는 값비싼 반지나 연비가 좋은 자동차를 선물하는 행위가 아니다. 나와 상대 모두 쥐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도 신뢰는 쌓을 수 있다. 가벼운 말 하나로도 상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 관계는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된다. 설령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헤어지거나 볼 수 없다고 한들 결코 나쁜 기억이나 상처로 남지 않는다. 지진이 일어나지 않은 세계엔 부서질 추억도 없으니까 남겨진 추억을 전시해둔 상태로 웃으며 살 수 있다. “참 좋은 사람이었어.”하고.

   이처럼 견고히 다져진 관계는 그 사람이 더 이상 그곳에 나와 함께 살지 않더라도 좋은 풍경으로 남는다. 그곳엔 사시사철 꽃이 피고, 밤이 오면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찾아와도 거부감 없이 문을 열어주고 “반가워요.” 인사하고 대접할 수 있는 용기마저 선물해준다. 그것이 우리가 누구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 거짓으로 일관한 관계는 서로에게 부서진 폐허로 남지만, 진실로 마주했던 관계는 모두의 세계관을 넓힌다.

   우리는 지금 서로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을까. 적어도 폐허는 아니길 바라며. 지금껏 당신이 건네준 용기로 이 작은 문을 열어 두겠다. 그러니 힘이 들 때면 언제든 찾아와도 좋다. 나는 당신이 나와 함께 있는 한, 아주 오래도록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전 07화 다정함의 가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