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다이어리
성인이 되고 난 이후, 내면에 커다란 선을 그으며 살았다. 여기까지만 생각하고, 여기까지만 하자. 선을 그은 지점까지 내 세상의 한계라고 규정 짓고 나면 마음이 편했다. 열심히 해 봐야 한계를 경험할 뿐이니까 작은 공간에 안주하길 택한 것이다. 밖이 조금도 보이지 않도록 빈틈없이 재단된 나의 내면은 날이 갈수록 좁아졌다. 그렇게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면서 유한한 에너지를 돌려 쓰는 일은 어느덧 내게 당연한 일이 되어 가고 있었다.
늘 이렇게 세상을 냉소적으로 살았던 건 아니었다. 어린 시절엔 나만큼 제멋대로인 아이가 없었다. 당돌하게도 나를 담기에 세상이 좁다고 판단했고, 거침없이 뚫고 나갈 생각만 했다. 대표적인 일례가 고등학생 때 쓴 기행문이었다. 학교에서 수학여행 기행문을 써오라는 과제를 받았던 날, 신바람 난 얼굴로 밤새 컴퓨터 키보드를 두들겼다. 쓸 이야기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장소부터 시간, 머릿속에 남아있는 풍경과 생각, 감정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렇게 새벽 4시까지 쓴 기행문은 A4로 무려 16장이나 뽑아내며 마무리됐다. 그 당시 종이는 내가 뚫고 나가야 할 대상이자 한계였던 것이다.
당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특반과 평반을 나누어 성적과 스펙 쌓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교내에서 열리는 모든 대회는 특반 학생들의 스펙 쌓기용이었고, 평반 학생들은 장려상 정도로 들러리 세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내가 기행문을 16장이나 써서 들고 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특반 학생들도 5장 겨우 채운 기행문을 평반 학생이 16장이나 채웠단 소문은 교무실을 강타했다. 나는 온갖 선생님께 불려가서 “네가 그 애구나.”라는 말을 들으며 왜 이렇게 길게 쓴 건지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했다. 그래봤자 내가 할 이야기라곤 “그때 수학여행이 재미있어서 느꼈던 대로 쓴 건데요.” 밖에 없었지만. 졸지에 대서사시가 되어버린 기행문은 결국 교장실까지 들어갔고, 생전 처음으로 교장 선생님과 독대했다.
“글을 참 잘 쓰는구나. 책도 많이 읽는 것 같고. 그런데 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니?”
성적에 열을 올리던 분답게 내 성적부터 물어보셨다.
“공부는 그냥 그래요. 저는 공부보단 글 쓰는 게 더 좋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했을 때 교장 선생님께서는 나를 안쓰럽게 응시했다. 그래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하고 공부의 중요성에 대해 일장연설만 늘어놓았다. 귀에서 피가 나는 것 같아서 대충 듣는 시늉만 하고 교장실 밖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계속 글을 써야지, 다짐하면서.
그때 난 하고 싶은 일은 전부 다 했다. 그것이 공부만 아니었을 뿐이지. 학교에서 부상으로 받은 문화상품권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다가 아프리카 아기들에게 보내줄 뜨개질 모자 키트를 산 적도 있다. 맨땅에 헤딩하는 도전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 목도리 하나 떠보겠다고 겨울 내도록 난리 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께 대바늘에 코 만드는 것만 한 달이나 혼나가면서 배웠던 기억은 능숙하게 아기 모자로 재탄생했다. 재미있던 건 친구들의 반응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뜨개질하는 날 보고 호기심을 느낀 친구들이 하나둘 나를 따라 모자를 뜨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을, 나는 단체로 뜨개질 키트까지 주문받아서 친구들에게 널리 퍼뜨렸다. 얼떨결에 봉사 주동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덕분에 그해 우리 학년은 가장 인류애가 넘치는 한 해를 보냈다. 물론, 고등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무슨 단체로 뜨개질이냐고 선생님께 혼도 났지만, 역시나 귓등으로도 안 듣고 열심히도 아기 모자를 떴다. 그렇게 만들어진 색색의 모자는 수십 개가 되어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때 우리가 만들었던 모자들은 과연 몇 명의 생명을 구했을까.
고등학생이 아침이 올 때까지 글을 쓰고, 공부보단 뜨개질에 열중해서 인류애를 채웠던 건 사회가 규정지었던 선을 넘는 일이었다. 공부로 제 앞가림하기 바쁜 시기에 미치지 않고서야 글만 열심히 쓰고 한가롭게 뜨개질이나 하고 있을 학생이 몇이나 있을까. 그러나 고등학생이니까 당연히 공부에만 몰두해야 한다던 사회적인 압박은 나를 조금도 묶어둘 수 없었다. 그때 나에게 중요했던 건 공부가 아니라 독서, 글쓰기, 인류애였다. 애초부터 한계란 게 있을 수 없는 것만을 열망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의 나는 나이, 직장, 금전 등 사회적인 단어에 꽁꽁 묶여있나. 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미리 한계를 느끼고 있는 걸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세상에 굴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다. 사회가 바라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진짜 나를 죽이고, 다들 그러고 산다는 말로 의지를 꺾으며 모두가 똑같아진다. 나 역시 그 흐름 속에 살았다. 적당히 사회와 타협하면서 깊은 생각을 하길 멈추고, 더 많은 일을 하길 주저하면서. 그동안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느라 얼마나 많은 자유를 잃었을까.
이제야 주변을 돌아본다.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조여오는 감옥 같은 내면과 대조되는 작은 창문이 보인다. 창밖엔 이미 수많은 계절이 지났고, 또 다가올 계절을 준비하고 있다. 본래 내 모습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한 문장을 남기고 나를 가두던 압박에서 벗어나려 한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체내에 있는 세포는 영원히 증식하거나 무한히 태어나지 않으며, 반드시 늙어가고 결국에 명을 다한다. 그러나 유한하기에 아름답고, 끝이 없는 꿈을 꿀 수 있다. 나 역시 결국 서서히 늙어가고 언젠가 명을 다하겠지만, 삶의 유한함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무한한 가치를 찾아서 유영하련다. 공부가 답이 아님을 알았던, 나를 조여오는 사회적 시선과 말들을 귓등으로 듣고 무시했던 그때의 나처럼 아주 자유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