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알지 못했던 나를 마주치는 순간이 있다. 특히, 마냥 싫어할 거라 예단하고 거리를 둔 것을 한순간에 좋아하게 되는 때가 그러하다. 나에게 2016년이 그런 한 해였다. 당시 친한 언니, 오빠들이 처음으로 인생 첫 야구관람을 제안한 것이다. 나는 야구 문외한이었다. 아는 것이라곤 홈런뿐인 야알못이었기에 야구관람 제안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경기 룰조차도 아예 몰랐던지라 괜히 갔다가 즐기지 못할까 봐 고민했다. 그러나 일단 가보면 재미있을 거라고 하도 설득을 해서 속는 셈 치고 야구장에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향한 곳은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로 삼성이 NC와 경기를 하던 날이었다. 그날 경기를 누가 이겼는지, 어떤 선수가 뛰었는지는 잊었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야구장의 응원문화였다. 앰프를 빵빵하게 틀어놓고 호응을 유도하는 응원단장과 마치 파도처럼 물결치는 야구팬들을 신기하단 듯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경기를 보면서도 여전히 야구 룰은 잘 알지 못했지만, 흥얼흥얼 응원가를 따라부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학창시절부터 체육을 수학 다음으로 싫어했고, 여전히 몸 쓰는 것을 싫어하던 나였지만, 그날 처음으로 ‘나도 스포츠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았다.
야구에 입문하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응원할 팀을 골랐다. 굳이 연고지를 따진다면 삼성을, 성적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두산을, 팬 문화와 응원문화에 더 빠지려면 롯데를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하필 내가 골랐던 팀은 kt wiz로 10구단 중 막내팀이었다. 연고지 팀도 아니고, 성적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매력적인 팬 문화도 없던 15년도 창단 막내팀은 어딜 가도 이리저리 치이기만 하는 신세였다. 승보다 패가 더 많았으며 중계에서조차 툭하면 조롱하는 만년 꼴찌팀이었다. 애초에 관심을 주지 말았어야 했건만 선수들이 아등바등 애쓰고 소중한 1승을 추가할 때마다 자꾸만 마음이 쓰이고 눈길이 갔다. 역사가 쓰이는 데는 반드시 긴 시간이 걸린단 걸 알았던 나는 결국 연민을 바탕에 깔고서 kt의 팬이 됐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거니까 부족함이 느껴지는 처음과 지금보다 더 성장한 처음을 함께하고 싶었다.
물론, 만년 꼴찌팀의 팬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2016년도엔 10위, 2017년도에도 10위, 2018년도엔 9위. 성적이 늘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보니 나까지 안 좋은 말을 많이 들어야 했다.
“아직도 kt 좋아하니? 그런 팀은 야구도 모르는 사람들이나 좋아할 팀 아니야? 매년 꼴찌나 하는데 도대체 왜 좋아해? 그냥 마음 편하게 팀 세탁해. 어차피 연고지 팀도 아니잖아.”
kt의 저조한 성적표는 곧 나의 성적표가 됐다. 졸지에 야구도 모르는 이상한 팬이 된 것이다. 그런 얘길 들을 때마다 괜히 속에서 뭔가가 욱하고 치미는 것을 느끼곤 했다. 팬인 내가 본 kt는 어린 선수들이 조금씩 성장하는 팀이었지만, 타팀 팬이 본 kt는 그저 만년 꼴찌에 불과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두고 보라고, kt가 가을야구 가는 날 언젠가는 꼭 온다고 말했지만 다들 코웃음만 쳤다.
당시 kt가 가을야구에 진입할 확률은 0%. 아무도 이 확률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팬인 나만 빼고 말이다.
kt의 반격이 시작된 건 다음 해인 2019년부터였다. 2019년에 처음으로 6위를 거머쥔 kt는 2020년도엔 처음으로 5강에 진입하고, 무려 3위까지 치고 올라가며 처음으로 가을야구를 맛봤다. 그리고 2021년엔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짧은 팀 역사를 안고서 정규시즌 1위와 최종순위 1위까지 차지한다. 모두가 0% 확률에 걸었던 막내 팀의 우승은 그렇게 선수들의 성장과 팬들의 믿음으로 100% 완성된 것이다.
야구, 배구, 축구, 농구 등 공을 다뤄야 하는 구기 종목 스포츠에선 빠지지 않고 나오는 명제가 하나 있다. “공은 둥글다.”라는 것. 그러나 인간은 불안정보다는 안정을 택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늘 확률에 의존한다. 공이 둥글다는 사실을 머리론 인지하면서도 강팀이 유리할 거라는 편견 역시 함께 작용한다.
따라서 스포츠는 늘 이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아주 높은 확률로 승리가 확실히 되던 팀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도, 또 아주 낮은 확률로 승리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팀이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가는 것도 단 하나의 공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공은 둥글다는 명제가 번번이 인간이 만들어낸 확률을 꺾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2024년 10월 3일, 짐실야구장에서 열린 와일드카드 결정전 역시 공은 둥글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다. 지금까지 타이브레이크까지 이기고 온 5위 팀이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4위를 업셋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두산이 준플레이오프로 갈 확률은 100%였고, kt가 준플레이오프로 갈 확률은 0%였다. 그 누구도 이 확률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산이 당연히 준플레이오프에 쉽게 진출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kt는 2일에 이어서 3일 경기까지 잡아내며 4위를 업셋했고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한국 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일어난 일로 기록지 안의 승률 0%가 승률 100%를 이긴 첫 사례가 되었다.
가을야구 근처에도 못 갈 줄 알았던 꼴찌팀 kt가 끝내 우승을 하고, 패배확률 0%를 뚫고 와일드 카드 업셋을 한 사례는 우리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준다. 중요한 건 확률이 아니라 일단 해보고 나를 믿는 태도라는 것이다. 확률은 인간이 만들어낸 기록 안에서 쌓인 숫자에 불과하다. 숫자는 둥근 공이 날아가는 방향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스포츠뿐만이 아니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확률게임을 마주한다. 수능으로 내가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하게 될 확률, 꿈의 직장에 입사할 확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사랑하게 될 확률, 바라던 결과대로 나오게 될 확률 등 우리는 일상 곳곳에서 삶을 좌지우지할 확률게임을 해야 한다. 그리고 아주 높은 확률로 우리가 기대하는 확률은 턱없이 낮은 수치를 기록한다. 그만큼 경쟁자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낮은 확률게임을 반드시 뚫고 통과한다. 원하던 대학교에 입학하고, 꿈의 직장에 입사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고, 바라던 결과를 받고 꿈을 이룬다. 그러니 우리는 확률에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나를 믿어야 한다. 남들이 뭐라고 하건 내가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면 시기가 언제든 반드시 길은 열리기 마련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0% 같은 건 없다. 내가 나를 믿으면 기록지 안의 0%는 아무도 몰랐던 기적의 100%가 될 수 있다. 우리 삶은 기록지 안에 없다. 그저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나에게 모든 것이 달려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