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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희 Mar 20. 2024

쉬기 전의 내가 나에게 너 지금 뭐 하냐 물을 때

분명 그랬습니다.

일을 할 때에도, 야근을 할 때에도

내 나이가 마흔을 넘긴 이후부터는 시간은

그야말로 쏜살같이 흘러갔습니다.


쉬어도 마찬가지네요.

더구나 오늘은 낮잠을 많이 자서인지 더 빨리 지나가버렸습니다.


쉬기 전의 당신이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국립공원을 다닐 테다. 아침에 카페에서 책을 읽을 테다.  늦잠을 잘 테다. 등등.


나는 늦잠을 자겠다는 약속은 기가 막히게 지킵니다.

국립공원은 두 번 다녀오고 산불방지기간을 핑계로 잠시 접어두고

아침에 카페에는 가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북한산과 도봉산을 매주 갈 것처럼 말했지만. 매일 눈으로만 바라봅니다. 백운대를. 신선대를. 아. 맞다. 지리산도 가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만 생각납니다.

잠시 뭔가 불안해지려고 해서


오늘 뭘 했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등교준비하는 아들 머리를 빗겨줍니다.

집을 나서는 아들들을 향해 손하트를 만들고

되지도 않는 윙크를 했습니다.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도 하고

복도 청소를 한다기에 현관 물청소도 했습니다.

왕초보 스페인어 인강을 듣고 스페인 역사 동영상도 보았습니다. 여행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강의도 한 시간 들었습니다.  

 엄마랑 안부통화를 하고

하교하는 아이들이 오자 “우리 아들 왔어?”라고 맞아주었습니다. 영어단어 쪽지시험을 치고 점수를 매겨주었습니다.

 배고플 것 같아 계란도 부쳐주고 오렌지도 깎아주고 바나나도 잘라주고 요플레도 이쁜 그릇에 담아주었습니다.

 밖에는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매트를 깔고 집에서 팔천 보를 걷습니다.

 거실에서 방까지 업어달라는 초등학생을 업어서 침대에 뉘어주고

 중2가 되어 공부범위가 늘어나 머리가 아프다는 아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줍니다. 그리고 꼭 안아줍니다.


 “하루를 이렇게 헐렁하게 살아도 되는 거야?”라고 당신이 말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오늘 브런치 글에서 ‘휴지기’라는 단어를 보았습니다. 내 밭은 지금 휴지기입니다. 휴지기를 거쳐야 더 실한 수확을 한다 합니다. 위로와 응원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은.

잘 못 자고 일어나 허겁지겁 출근하던 당신이 그토록 원했던 하루가 맞는 것 같습니다.


 나를 다그치지 않을 겁니다.

소재가 있고 채워져야 한다는 당신의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재가 없어도

 웃고, 이야기하고, 안아주고, 늦잠 자는 이 생활도 틀리지 않습니다.

 내가 산을 좋아했던 건 산이 나에게 주는 위무 때문이었는데, 나는 지금 산이 주는 위무가 절실하지 않을 만큼 가족들과 웃는 이 시간이 참 귀하고 편하고 좋습니다.  


 나는 오늘 하루 잘 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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