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냥이 태희가 우리 집에 새끼를 여섯 마리나 낳았다. 새끼를 낳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우리 집 일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게다가 여섯 마리라는 걸 알았을 때, 솔직히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고스란히 나의 책임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놀란 가슴을 추스를 무렵, 두세 번 본 적이 있는 길냥이 예쁜이가 암컷이었으며, 우리 집 근처에 세 마리 새끼를 낳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섯 마리만으로도 숨이 턱에 차는 기분인데, 거기다 세 마리가 더 얹힌 셈이다. 아, 이건 도대체 어떻게 전개되는 시나리오란 말인가.
마음이 편할 날이 없는 요즘, 게다가 우리 집 뭉치의 새끼 중 하나인 길냥이 쿵이가 많이 아파 보인다. 예전처럼 자주 볼 수 없다면 잘 몰랐을 텐데, 뭔 일인지 요즘따라 계속 마주친다. 전보다 훨씬 더 말랐고, 그루밍도 못 하는지, 꼴이 거지꼴인 데다가 통조림을 줘도 영 먹지 못하고 설사를 한다. 안쓰러워서 볼 때마다 마음이 찢어진다. '내 손을 타는 길냥이들에게만 도움의 손길을' 이란 애초의 결심대로 애써 모른 척해 본다. 다행스러운 건지 아닌 건지 쿵이는 내 손을 전혀 타지 않고 한 성질 하는 터라 중성화 수술시켜줄 때도 애를 먹였던 아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시험 삼아 내민 내 손길을 쿵이가 거부하지 않는다. 그렇게 무섭게 하악질을 해대던 사납던 쿵이가 내 손길을 받아들인 것이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골골 소리를 내며 몸을 내게 기대 온다. 기적 같은 일이긴 한데. 아,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병원을 데려가 달란 이야기인 걸까.
길냥이들에게 밥을 줄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던 시절, 가장 큰 걱정은 그것이었다. 한 마리로 시작해 두 마리 세 마리,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길냥이가 늘어난다면? 뒷마당에 새끼라도 낳는다면?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고 했던가. 현재 걱정한 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이 세상에 불쌍한 동물들이 너무 많다. 어차피 내가 다 책임질 수도 없다. '적당한 선까지만 도움을 주자'는 것이 내 결심이었다. 지나치게 엮여서 삶을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막상 길냥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다 보니 '적당한 선을' 지킨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걸 매 순간 느낀다. 모르는 척하고 싶어도 그게 잘 안된다. 마음이 너무 불편하다(나도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착했는가 싶다). 가족이나 친구들한테나 좀 잘하지 뭐하나 싶어 모르는 척하려다가도 결국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게 된다. 힘들더라도 마음이 편한 쪽이 낫지 싶어서.
이 와중에 설상가상, 뭉치의 다른 새끼, 길냥이 몽이가 피부병에 걸렸다. 몽이는 우리 집 길냥이 중 내 손을 타는 유일한 아이여서 늘 유심히 살펴볼 수 있는데, 어느 날부턴가 자꾸 털이 빠진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번진다. 저대로 놔둬도 괜찮은 걸까. 몽이도 병원에 데려가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오~ 신이시여.
다행히도 쿵이는 다소 시간이 지나자, 상태가 많이 호전됐다. 밥도 잘 먹고 기력도 많이 회복했다. 피부병이 심해진 몽이는 결국 병원에 데려갔다. 곰팡이성 피부병이라며 연고+먹는 약+약물 목욕을 처방해 준다. 전염성인 데다가 쉽게 낫는 병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몽이가 개냥이긴 하지만 우리 뭉치도 반항이 심해 못 시키는 목욕을 도대체 어떻게 시킨단 말인가. 게다가 전염성이라니, 매일 함께 다니는 알콩이나 다른 냥이한테까지 옮으면 어떻게 하나. 아니, 9마리나 되는 새끼 냥이에게 옮는다면? 피부병이 나을 때까지 집에 가둬볼까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금세 포기했다. 병원에 데려가는 것만으로도 곡소리를 내는데, 길에서 자유롭게 지내던 아이를 가두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 것인가. 지켜보던 길냥이가 아파 보일 때의 심정이란. 내 새끼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면 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지켜보는 마음만 안타까울 뿐이다
하는 데까지는 몽이를 치료하기로 했지만, 목욕 한 번 시키고 약 3~4번 먹인후에 포기했다. 목욕시키다가 아주 몽이 죽이는 줄 알았다. 게다가 약을 먹이려면 강제로 잡아야 하는데 눈치 뻔한 몽이가 이제 나를 슬금슬금 피하기 시작한다. 이러다가 약도 못 발라주고, 나만 보면 도망가지 싶어 깨끗이 포기했다. 아침마다 약만 발라주고 있는 중이다. 약 바르는 것도 싫어하지만, 살살 달래며 쓰다듬는 척 연기하며 발라주는 중이다. 낫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곰팡이균이라니 찬바람이 불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우리 집 길냥이들을 생각하면 항상 근심 또 근심이다. 병약해 보이는 쿵이도 걱정, 나이 들어 보이는 늘보도 걱정, 멀리서도 털이 숭숭 빠진 곳이 보이는 6마리 엄마냥 태희도 걱정, 군데군데 피부병이 있는 예쁜이 새끼냥들도 걱정이다. 최근엔 3~4개월 되어 보이는 아기 냥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데(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엄마 잃은 것 같아 유심히 지켜보는 중이다. 대숲에 숨어 울고 있는 모습이 짠하고 또 짠하다. 내 손을 타도 걱정, 안 타면 안타는 대로 걱정.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저 아이들의 운명이라지만, 쳐다만 봐야 하는 나의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디 우리 집 길냥이들 뿐이겠는가. 세상 모든 힘없고 약한 동물들이 다 그저 안쓰럽고 또 안쓰럽다.
안타까움과 힘든 마음을 뒤로하고, 나는 오늘도 내 몫의 책임을 감당한다.
엄마 잃고 대나무 숲에서 울기만 하던, 나만 보면 줄행랑치던 알콩이가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되어 내 앞에서 밥을 먹는다. 놀라운 발전이다. 하악질 하며 사납게 굴던 쿵이가 내 손길을 받아들일 때, 길에서 태어난 몽이가 내 앞에서 배를 드러내며 애교를 피울 때, 나만 보면 경계하던 태희 새끼들이 태연히 내 앞에서 낮잠을 잘 때, 이렇게 길냥이들과 조금씩 교감하는 마법 같은 순간들이 켜켜이 쌓여 큰 기쁨이 된다. 나는 길냥이들의 눈동자 속에서 삶의 기쁨을, 생명의 신비함을 본다. 내가 길냥이들을 모르는 척할 수 없는 이유다.
나는 여전히 아침마다 부지런히 밥을 주고, 틈틈이 요놈 조놈 길냥이들을 살핀다. 그렇게 나의 하루하루가 저물어간다. 나는 길냥이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