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냥이 '늘보'는 나의 '첫정'이다.
2년 전 뒤뜰에서 길냥이 밥을 주기 시작하며 처음 만나게 된 고양이가 '늘보'다. 첫 번째로 이름을 지어준 길냥이다. 다른 냥이들과 달리 36계 줄행랑을 치지 않아 낯을 익힐 수 있었고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30센티미터 친구가 되었다(내 손을 타지 않지만, 30센티 거리까지는 허용한다는 뜻이다).
어떤 때는 매일 아침 도장 찍듯 얼굴을 내밀었고, 어떤 시기에는 며칠에 한 번씩 드문드문 얼굴을 내밀었다. 늘보는 피부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았고, 움직임도 둔했다. 나는 늘보가 나이가 꽤 많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래서였을까. 늘보와 정이 든 순간부터 어느 정도 늘보와의 이별을 예감하고 있었다. 길냥이들의 평균수명은 3년 정도라고 한다. 집냥이들이 오래 살면 20년까지 사는 것과 대조적이다. 죽음을 앞둔 길냥이는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은밀한 곳으로 숨어든다고 한다. 나는 늘 생각했다. 자주 보던 길냥이가 오랜 시간 동안 보이지 않는다면, 그게 곧 이별을 의미하는 거구겠나 하고.
정확히는 가늠하기 힘들지만 늘보가 보이지 않은 지 몇 달이 지났다. 길냥이가 자기 구역을 벗어나는 일이 드문 것을 생각해볼 때 아마도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것이다. 늘보가 오랜 시간 보이지 않자, 나는 이것이 오랫동안 예감했던 우리의 이별임을 알았다. 보이지 않는 것은 늘보뿐이 아니다. 길냥이에서 우리 집냥이가 된 하늘이의 엄마 '쿵이'도 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하늘이를 업어왔던 작년 가을 무렵부터 보이지 않는다. 작고 마르고 한없이 병약해 보였던 쿵이는 아마도 그때쯤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확률이 높다. 어미 잃은 쿵이 새끼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죽었을 것이고, 그중에 하늘이가 어쩌다 우리 집까지 흘러오게 된 것일 것이다.
늘보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다. 처음으로 이름을 지어주고, 마음을 내어 준 냥이이기 때문이다. 늘보는 성품이 유순하고 마음이 따뜻했다. 다른 길냥이들에게 하악질 한 번 하지 않았고, 때로는 자기 밥그릇을 다른 냥이에게 내어주기도 했다. 태희네 6남매 꼬물이 시절에는 6남매를 보호하려는 듯 주변을 맴돌기도 했다. 그런 늘보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훈훈해졌다. 늘보는 지금쯤 고양이 별에서 여전히 다른 냥이들을 배려하고 있을까.
쿵이는 세상을 떠난 우리 집 뭉치가 길냥이 시절 낳았던 새끼 중 하나다. 처음엔 경계가 무척이나 심했는데, 이후에는 극적으로 변심해(?) 내 손을 탔다. 자주 볼 수 없었지만 며칠에 한 번씩 나타나 곡소리를(?) 냈던 녀석이다. 배고프니 통조림을 내어놓으란 소리로 들렸는데, 통조림을 내어주면 한 번에 2캔씩 먹어치우곤 했다. 자주 볼 수 없어 중성화 수술을 빨리 해주지 못했고, 수술을 했을 때 이미 새끼를 낳은 후였다. 8개월령에 출산한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안 그래도 작고 마른 쿵이는 걸음걸이가 위태로운 것이 늘 어딘가 아파 보였다. 내 손을 타게 된 이후에는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많이 고민하기도 했었는데, 나는 결국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 그게 가장 후회가 된다. 그때 병원에 데려갔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쿵이는 아직 살아 있을까.
1년 6개월의 짧은 삶을 살다 간 쿵이와, 길냥이로 힘든 생활을 오래 겪었을 늘보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더욱더 안타까운 사실은 이들의 죽음을 슬퍼할 이도 없고, 누구도 이들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늘보와 쿵이뿐이겠는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생명이 길에서 목숨을 잃는다. 누구의 기억 속에도 없는 그들의 죽음이 참 쓸쓸하다. 늘보도 쿵이도 이젠 오롯이 나의 기억 속에서만 남았다. 아니 나의 기억 속에서만큼은 영원할 것이다.
작별인사도 없이 먼 길을 떠난 늘보와 쿵이를,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