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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 깃털 Dec 13. 2019

마당이 있는 집에 산다는 것 18

고양이 사료의 비밀 - 누가 고양이 사료를 훔쳐먹는가

뒷마당에 고양이 사료 급식대를 만든 지 수년이 되어간다.


처음에는 누가 먹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먹는 양이 적었다. 당연히 밥그릇도 작았다. 지금은 커다란 냄비 사이즈만큼 밥그릇이 커졌다. 아침에 가보면 사료가 남아있는 날보다 그릇이 텅 비어있는 날이 많다. 그런 날은 평소 이 시간에 만나기 힘든 길냥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기도 한다. 내가 밥 주러 나오길 기다리면서.


나는 늘 궁금했다. 그 많은 사료를 어떤 길냥이들이 먹는 건지.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우리 집 근처 길냥이들은 거의 다 내가 꿰고 있다. 아무리 후하게 쳐도 15마리를 넘지 않을 듯싶은데, 먹는 사료양은 그 수준이 아니다. 늘 생각했다. 그래, 온 동네 고양이가 우리 집 사료를 먹고 있는가 보다. 대개 밤 시간에 다녀가겠지. 뭐, 인심 한 번 크게 쓴다고 생각하지. 이렇게.


얼마 전의 일이다. 그날도 아침나절에 사료를 세팅하러 뒷마당으로 나섰다. 밥을 먹고 있는 길냥이 궁둥이가 보인다. 어라, 뉴페이스인데? 캣맘 역사 수년이 되다 보니, 이젠 궁둥이만 봐도 어떤 냥이지 알 수가 있다. 나를 보고 유유히 대숲을 지나 뒷산으로 도망을 가는데. 뭐지. 고양이가 아니네. 설마 오. 소. 리. 얼굴은 흡사 멧돼지처럼 생겼는데 크기는 멧돼지보다 훨씬 작다. 오소리를 한 번도 본 적은 없는데, 그때 나의 뇌리에서 떠오른 단어는 바로 '오소리'였다.


오소리 사진, 요 아이는 제법 귀엽지만 직접 본 오소리는 그다지.......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오소리가 맞다. 오소리까지 고양이 사료를 먹고 있으니, 생각보다 많은 양의 사료가 들 수밖에. 아, 내가 뒷산 오소리까지 먹여 살리고 있었구나. 우리 집 뒷마당은 생태계의 보고, 아니면 정글이 되어가고 있는 건가. 육식동물이라는데 오죽하면 고양이 사료까지 먹나 싶어 측은해, 두고 봐야지 별 수 있겠는가 싶었다. 시골에 살면 뭐 그렇게 이 동물 저 동물 어울려서 사는 거지 했는데.


그로부터 이틀 뒤, 대숲에서 또 오소리를 발견했다. 아예 우리 집에 자리를 잡았구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오소리가 아니다. 너구리다. 누가 봐도 너구리다. 헉, 너구리까지. 며칠 지켜보니 너구리인지 오소리인지 아주 우리 집에 자리를 잡은 모양새다. 어떤 날은 보일러실에 들어가면 날 보고 놀라 숨는데, 작지도 않은 몸을 어디다 숨겼는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보일러실을 아주 난장판을 만들어놨다. 


사진 속 너구리가 엄청 귀엽습니다. 

며칠 전 아침엔 원래 예쁜이(길냥이)의 전용 집에 떡 하니 들어가서 잠을 자고 있는 걸 발견했는데,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쟤가 저기서 겨울잠을 자나 싶어 황당하기까지 했다. 예쁜이를 위해 특별히 이중으로 보온처리까지 한 특별한 집인데, 예쁜이는 졸지에 제 집에서 쫓겨난 꼴이 되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먹이가 끊긴 너구리나 오소리가 민가에 나타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고 한다. 지나친 개발 탓에 들짐승들의 생활구역이 줄어들고, 먹을 걸 구하기 힘들어지니 민가까지 내려오는 것이라고. 한두 번 내려왔는데 사람이 해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그 이후에도 자주 내려온다고. 그러니까 쟤들도 우리 집 식구가 된 거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하다 하다 내가 너구리나 오소리까지 우리 집에 들이게 될 줄이야. 


우리 집 뒷마당은 길냥이, 오소리, 너구리가 공존하는 진정한 생태계의 보고(?) 다.

들짐승이 들짐승처럼 살지 못하는 것은 따지고 보니 인간의 지나친 이기심과 욕심 때문일 것이다. 고로, 내가 쟤들때문에 다소간의 손해 내지는 불편함이 생긴다 하더라도, 어차피 이건 인간으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인 것으로 결론을 내려본다. 다행히도 길냥이들과 별 마찰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이렇게 한 식구가 되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싶다. 우리 집 뒷마당은 어째 점점 '동물들의 천국'이 되어 가고 있는 모양새다. 길냥이 두더지에 이제 오소리, 너구리까지. 여러 가지로 걱정스럽긴 해도 그렇게 싫지많은 않으니 이것도 운명이랄밖에. 이런 게 마당이 있는 집에 사는 묘미가 아니겠는가.


모르겠다. 이러다가 정말 어느 날 멧돼지까지 보게 되는 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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