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선택을 존중할 뿐이죠
"왜 뒷마당 길냥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오지 않아요?"
두 달쯤 사귀었던 전남친과 썸을 탈 때, 뒷마당에 길냥이들이 산다고 말하는 내게 그가 던졌던 질문이다.
'길에서 나서 길에서 자란 아이를 아무 생각 없이 집에 들이는 것도 다른 종류의 폭력이 될 수 있다'라고 대답을 했던 것 같고, 그가 거기에 대해 뭐라 답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는데 '쎄~'했던 느낌은 기억한다. 순간 분위기의 미묘함을 알아챈 그가 말머리를 돌리는 것으로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 사람이 돌+아이라는 사실을^^. 남자 보는 눈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 나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길냥이들의 삶은 고달프다. 먹을 것 구하기도, 마실 물 구하기도 쉽지 않다. 도심 속의 고양이들은 해코지하려는 인간들도 피해야 한다. 또 긴 겨울은 너무 춥다. 그런데 길에서의 삶은 정말 고달프기만 할까. 사냥 본능이 뛰어나고 야생성이 강하다는 고양이들에겐 집냥이로서의 삶은 지나치게 지루하진 않을까.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의 생활방식을 익힌 아이들을 임의로 집에 들이는 일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다. 일부 국가에서는 이런 행위를 또 다른 종류의 동물학대로 규정하기도 한다고도 한다.
길냥이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경계한다. 험한 길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한 본능이다. 길냥이와 일부러 친해지려고 노력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사람도 많다. 사람과 친해지는 것이 생존에 불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길냥이에게 해코지하는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이 있다). 뒷마당에서 사료를 주며 수없이 많은 길냥이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대개는 사람을 심하게 경계한다. 밥 주는 나에게도 인색하다. 얼굴 익히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우리 집 뒷마당에 새끼를 낳은 태희도, 예쁜이도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뒤꽁무니를 몇 번 보았을 뿐이다. 얘네들이 얼굴 한 번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더니, 턱 하니 우리 집에 새끼를 낳고 살림을 차린 것이다. 태희 새끼들도 예쁜이 새끼들도 어미를 닮아 나를 피하긴 매한가지였다. 특히 태희네 육 남매는 숨어서 지켜보던 내가 부스럭거리기만 해도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런데 여기에도, 세상 이치가 늘 그렇듯 예외가 있다. 길에서 태어났는데도 사람을 따르고 낯을 안 가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뭉치와, 뭉치의 새끼인 몽이와 쿵이가 그랬다. 구조해 입양 보냈던 알록이도 그랬다. 우리 학교의 마스코트냥 '건빵이 모자'와 '뚱이'도 소문난 개냥이들로, 학교에서 얘들 모르면 간첩이다. 이렇듯 첫 만남에 손을 타는 길냥이들이 의외로 많다. 우리 하늘이는 또 어떠했던가. 첫 만남 후, 일주일 만에 나타나서는 무릎에 안겨 바로 골골댔다. 이성적 계산을 하지 못하고 집에 들였던 결정적인 이유다. 하늘이는 그때 누가 봐도 어미 잃고 제대로 먹지 못해 굶어 죽기 직전의 행색이었다. 그런데다 무릎 위에서 골골이라니, 누구라도 외면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태희네 육 남매나 예쁜이네 삼 남매가 조금이라도 나를 따르거나 손을 탔더라면 나는 아마 얘네들을 모른 척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열심히 입양 자리를 알아보든, 내가 다 책임을 지든, 어떻게든 했을 것 같다. 본의 아니게 다묘 가정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를 너무 따랐던 몽이를 집에 들이지 않았던 것도, 이미 길 생활에 적응한 아이를 집에 들이는 것도 폭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볼 때마다 업어오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반면 하늘이는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집이 필요해. 엄마가 필요해. 먹을 것이 필요해. 나를 제발 집으로 데려가 줘'라고. 아니, '내가 널 찍었어. 넌 이제부터 내 집사야~'라고.
수많은 길냥이들을 만나고, 인연을 맺다 보니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아진다(예전에는 길냥이를 만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가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기도 한데, 힘들지만 지금의 내가 좋다). 길에는 왜 그리 고양이들이 많은 건지 온통 길냥이들만 보이는 지금, 아이들을 볼 때마다 소소한 고민들을 하게 된다. 길냥이들과 어떻게 공존하는 게 바람직한 건지, 우리는 길냥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지. 누구는 구조하고, 누군가는 집에 들이고, 누군가는 길에 남겨놓고 그 기준은 또 도대체 무엇인지. 고민이 될 때마다 조심스럽게 마음속 나만의 기준을 되뇌어 본다.
"집사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선택은 고양이의 몫,
우리는 그 결정을 존중할 수 있을 뿐" 이렇게.
길냥이 뭉치를 집에 들였던 가장 큰 이유는, 이미 집 생활을 경험해봤던 아이라 충분히 적응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뭉치를 집에 들였던 선택은 절반만 옳은 선택이었다. 길 생활이 불행할 것이라는 판단은 오만했다. 외출을 하는 뭉치의 모습이, 산과 들을 누비는 뭉치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우리 집에 갇혀있던 몇 개월의 시간이 뭉치에게 너무 힘든 시간이 아니었을까. 뭉치에게는 자유가 안전보다 훨씬 소중한 가치였다는 것을, 뭉치가 세상을 떠난 지금, 비로소 알 것도 같다.
무슨 일이든지 순리를 따르는 것이 맞는 일 같다. 사람과 동물의 인연 또한 그렇지 않을까. 뭉치를 집에 들인일이 구조였는지, 나의 욕심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인간과 동물은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동물의 생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짐작에서 비롯된 행동이 어떤 경우에는 배려가 될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외려 폭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렵다. 세상 쉬운 일이 하나 없다는 말이 꼭 맞다. 상대방의 결정과 선택을 존중하는 것과,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방조하거나 외면하지 않는 일의 경계가 참 어렵다.
우리 집 뒤뜰 터주대감 예쁜이가 어딘가 아파 보인다. 잠자는 시간이 유독 길고, 바싹 마른 것이 밥도 잘 못 먹는 것 같다. 하루하루 나의 고민은 깊어간다. 잡기도 힘든 예쁜이를 어찌해야 하는 건지. 나는 오늘도 경계선에 서 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