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마흔여섯, 새로운 출발선에 서다 (2017.4.20)
작년 12월 말에 나는 나름(?) 큰 수술을 받았다. 일상을 위협하는 계속되는 통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다. 처음 해보는 수술에 대한 공포,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후회하게 될 선택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같은 복잡한 감정들과 홀로 고군분투하며, 이제는 영원히 '엄마'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당연히 쉬운 선택도, 과정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혼자 결정하고 감당해야 한다는 게 힘들었다. 수술 후 한 달 반이 되어간다. 아직까지 몸이 채 회복되지 않았지만, '삶의 질'이 달라질 거란 의사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는 걸 조금씩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입원하기 전날, 우리 집 마당 밤하늘 풍경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들을 했다. 다시 이 집으로 돌아와서 저 풍경을 또 내 눈에 담을 수 있을까.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그간의 내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수술을 하고, 다시 예전처럼 건강해진다면, 그때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생에 큰 불만은 없다. 좋은 부모를 만나 부자는 아니었어도 '가난'의 고통을 모르고 살았고, 주어진 나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열심히 무엇이 옳은 삶인지 찾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다. 언제나 최선이었는지는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늘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뒤돌아보는 삶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내가 살아온 마흔다섯 해가 과연 정답이었는지, 아니, 삶에 정답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난 자꾸만 꿈을 꾼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 되기를.
그래서, 몇 가지 소소한 목표를 세웠다. 그중의 한 가지가 바로 '글쓰기'다. 어릴 땐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설 가뿐이었으랴, 영화감독도 뮤지션도 되고 싶었다. 창조적인 일을 꿈꿨다. 아마도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것이었으리라. 대안은 사진이었다. 소설가도 영화감독 뮤지션도 불가능하겠지만, 사진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오만이었을 것이다. 사진학과를 다니면서 한때 '좀 찍는'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으나, 사진마저도 쉽게 포기했다. 나에게 없던 것은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아니라 '투지'와 '열정'이었던 것. 지금은 첫 번째 전공을 살려 '사서'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예술가'가 아닌 그냥 '문화예술' 전반에 관심만 많은(?) 평범한 일반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게 내 적성에 더 맞는다는 결론을 내린 채 말이다.
그런데 우연히 '브런치'를 만났다. 이런 게 있었구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작가가 되고 싶은 건 아니다. 어릴 때 꾸었던 꿈을 이루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반려견 두 마리와 마당 있는 집에서 사는 소소한 일상이 너무 평화롭고 행복해서 사실, 이제와 몸과 마음 고달프게 치열하게 살고 싶진 않다. 그냥 돌아보고, 생각하고, 그리고 쓰고 싶다. 나란 사람에 대한 글을 쓰고 싶은가 보다. 독자가 있으면 있는 대로 소통할 수 있어 좋겠고, 없어도 스스로 만족하면 그만인, 그냥 나를 위한 글. 쓰. 기.
이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어느 정도 글이 쌓이면, '브런치 작가'에 도전장을 내밀어봐야지. 이 글쓰기가 진정 나에게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을까. 아직은 에너지가 많이 딸려 대외적인 활동이 버거운 나에게 글쓰기가 새로운 활력소가 되기를 바라본다. 마음속의 얘기들을 풀어내지 못해 늘 맘이 아팠던 젊은 시절, 글쓰기는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그 아팠던 시절을 견디게 해 줬던 글쓰기가, 삶의 방향은 잃은 듯한 지금의 나에게 또 다른 숨구멍이 되어줄 수 있을까. 이렇게 나는 새롭게 시작한다. 지금부터 '시작'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