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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 깃털 Jul 19. 2017

채식주의자로 한번 살아볼까?

나에게도 '버킷 리스트'가 있다. 몇 년 전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버킷리스트 중에 '단 일 년만이라도 채식주의자로 살아보기' 가 있다. 아마도 몇몇 책을 읽으면서, '인간이 육식을 소비하는 방식'을 불편하게 느꼈을 것이고, 그 불편함은 반려동물과 함께하면서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은 소망'과 연결되었을 것이다. 몇 년 동안 그저 '로망'이기만 했었는데, 최근 '일련의 작은 사건사고'를 거치면서 저 '로망'을 '실현'해 보기로 결심했다. 중간에 포기하더라도 용기 내어 일단 도전해 보기로 한 것이다. 한달이 다 되어간다. 아직까지는 순조롭게 잘 흘러간다.


완전한 채식주의자 까지는 엄두가 나지 않고, 일단 페스코 베지테리언(육식만 먹지 않는 가장 가벼운 단계의 채식주의자)으로 살아보기로 했다. 솔직히 완벽한 채식은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채식을 결심한 이유가 '인간이 육식을 소비하는 방식'에 반대하는 신념대로 살고 싶어서기 때문이다. 채식을 구체적으로 실행해 옮기기 전에 무엇을 먹을 수 없는지 곰곰이 따져보았다. 생각보다 광범위했다. 햄버거, 만두, 소시지, (내가 엄청 좋아하던) 육개장 칼국수 같은 것도 먹을 수 없다. 채식을 결심하면서 비빔막국수와 짜장면에 볶은 돼지고기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 이제는 먹을 수 없게 된 수많은 음식들이여. 페스코 테리언이 되는 것도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모든 동물은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슬픔, 기쁨, 고통, 외로움 등)을 똑같이 느낀다.

나는 사실 고기를 엄청 좋아하는 육식 마니아였다. 점심시간에 삼겹살을 먹는 것도 흔한 일이었고, 혼자 살면서도 가끔 고기를 사다가 구워 먹었다. 그러다가 '육식의 종말(제레미 리프킨)' '희망의 이유, 희망의 밥상(제인 구달)' '음식혁명(존 로빈스)' 같은 책들을 접하게 되고 거짓말처럼 고기를 먹는 횟수가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됐다. 예전에는 '내 몸이 고기를 원한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런 느낌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생각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몸의 변화로 이어진 경우랄까. 하지만 우리는 대개 집밥보다는 외식하는 경우가 더 많고, 외식을 하면 고기를 먹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채식을 결심하면서 내가 생각보다 고기를 훨씬 더 많이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과연 채식주의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유명한 동물운동가 '헨리 스피라'의 평전을 읽은 적이 있다. 헨리 스피라는 '어떤 동물은 눈을 맞추고 예뻐하면서, 어떤 동물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먹어치우는 아이러니'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을 읽은 후부터 나는 싸복이 남매는 눈을 맞추고 사랑하면서 어떤 동물은 단지 직접적인 살해가 아니라는 이유로 적당히 눈감는 나 자신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반려견과 내가 먹는 돼지나 소 같은 동물들이 뭐가 다른 것일까. 모든 생명은 다 소중하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하지만 이 신념은 행동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신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삶이 종종 나를 불편하게 한다. 누구나 다 신념과 가치대로 행동하는 건 아니지만, 신념대로 사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신념과 가치에 반하는 짓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하면서 살고 싶다.


싸복이 남매와 눈을 맞출때마다 늘 다른 동물들을 생각한다.

동물 털로 된 제품 쓰지 않기, 종이컵 쓰지 않기. 내가 생활 속에서 작게 실천해 오던 것들이다. '가죽제품 쓰지 않기'도 생각 중인데 아직은 결심이 쉽지 않다. 그 밖에도 나는 신념에 배척되는 행동을 많이 하고 살지만 조금씩 조금씩 줄여보기로 결심해 본다. 일단, 채식에 도전을 해 본 것처럼. 한 사람이 일 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으면 꽤 넓은 숲을 살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강렬하게 '페스코 테리언'에 도전하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의 작은 노력이 지구를 살리는데 도움이 된다니. 


마흔 하고도 여섯 해를 살았다. 허리춤에 '자연으로 돌아가라', 등짝에 '자연과 우주'를 상징하는 타투를 십여 년 전에 새기고도 나는 신념대로 살지 못했다. 신념과 욕망 사이에서 언제나 욕망이 승리한다. 늘 반성한다. 아프리카 부족들은 몸에 타투를 새기는 것을, 영혼에 뭔가를 새겨 넣는 것이라고 보았다. 내게도 같은 의미다. 영혼에 새겨 넣은 저 신념을 쉰을 목전에 둔 지금 조금이라도 실천하면서 살아보고 싶다.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정녕 채식주의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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