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숨어서 유심히 지켜봤는데 움직임이 흡사 '나무늘보'를 연상시켰다. 손 하나 움직이는데 왜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 그래서 '늘보'가 되었다.
우리 집에서 밥을 먹는 길냥이들이 한 둘이 아닐 텐데, 눈에 띄는 일은 흔치 않다.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길지 않고, 대개는 아침에만 잠깐 뒤뜰에 밥 주러 들리므로 마주칠 일이 없는 데다, 길냥이들답게 사람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 때문이다. 그런 길냥이들 중에서 늘보는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언젠가부터 (몇 개월쯤 되었을까?) 늘 아침마다 대나무 숲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가가면 슬쩍 피하긴 해도 다른 길냥이처럼 36계 줄행랑을 치지는 않는다. 당연히 눈에 익을 수밖에 없었다.
첫인상은 그랬다. '아, 크다(고양이치고). 정말 못 생겼다(늘보야~ 미안~). 자주 보는 녀석이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눈도 꿈뻑여보고(고양이 인사법이라고 했다) 살가운 목소리도 내 보았으나 쉽지 않았다. 조금 다가가려 하면 너무 긴장하는 터라 모르는 척하는 것이 예의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줄행랑을 치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살펴볼 수 있었다. 자세히 보면 '찐빵같이 동글동글한 얼굴에 움직임이 느리고 고상한' 매력적인 고양이다. 자꾸 보니 정이 들었다. 그렇게 늘보와 나는 딱 2미터 친구사이가 되었다.(2미터 이하는 허용하지 않는 사이)
2미터 친구사이였던 늘보와 나 사이가 '30센티'까지 줄어든 계기가 있다. 뭉치 때문이다. 중성화 수술을 시켜준 후 뭉치는 우리 집에 거의 매일 눈도장을 찍는다. 그런 뭉치가 예뻐 통조림 캔을 따주기 시작했다. 어느 날이었다. 보일러실에서 뭉치에게 통조림 캔을 먹이고 있는데 늘보가 쓰윽 다가와 문 사이로 고개를 내민다. 평소 나를 피하는 녀석이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안쓰러운 마음에 통조림을 주기 시작했다. 역시 통조림 캔의 힘은 사료보다 위대했다. 이제는 매일 아침 통조림을 얻어먹기 위해 나에게 눈도장을 찍는다. 손길을 결코 허락지 않지만 30센티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는, '30센티 친구사이'가 된 것이다.
아침에 뒤꼍에 가보면 어느 날은 대나무 숲에 몸을 숨기고 있고, (사실 숨겨지지도 않는다. 훤히 다 보인다) 어느 날은 이웃집과의 담장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요즘은 내가 일부러 문을 잠그지 않는 보일러실에서 뛰어나오는데, 날도 추운데 자리 잡았나 싶어 다행스러운 마음이기도 하다. 어쩌다 한 번씩 안 보이는 날이 있는데 그런 날은 '무지개다리'를 건넜을까 싶어 마음이 안 좋다. 하지만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얼굴을 비춰 나를 안심시킨다. 왠지 늘보는 나이가 많을 것 같고, (길냥이로서 내공이 상당해 보인다.) 다른 길냥이에게 사료를 양보하기도 하는 걸 보면 마음 씀씀이도 있어 보인다. 다행히도 늘보는 수컷이다. 암컷이었으면 늘보를 어떻게 잡아 중성화 수술을 시켜주나 또 한참 고민했을 것이다.
뭉치도, 늘보도, 또 우리 집에서 밥을 먹는 또 다른 길냥이들은 어쩌면 나에겐 그냥 길에서 지나치고 말 별다른 의미 없는 존재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밥을 주고, 이름을 지어주고, 눈을 맞추고, 매일매일의 그런 작은 순간들이 쌓여 늘보와 나 사이에, 뭉치와 나 사이에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만들어졌다. 그걸 무어라고 설명해야 할까. 싸복이 남매와 함께하면서, 마당 있는 집에 살기 시작하면서, 길냥이들과 교감하면서, 무언가 내 인생에 작은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 변화가 나쁘지 않다. 아니, 참 좋다. 맨 처음 뒤뜰에 고양이 사료를 놓아두기 전까지 소소한 고민들이 많아 선뜻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고민하던 그때에는 나의 행동이 이렇게 길냥이들과의 인연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생각할수록 소중한 인연이다. 뭉치를, 늘보를, 알록이와 알콩이 모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싸복이 남매처럼 함께 살을 맞대고 살지 않는다고 해도 나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묘연(猫緣)'들이다. 어떤 식으로든 오래오래 인연을 오래 이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몇 살인지 모르는 늘보야~ 너는 비록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저 그런 길냥이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무척이나 특별한 존재란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될지 모르지만, 오랜 시간 함께하며 알콩달콩 우정을 쌓아가자꾸나. 보일러실은 항상 열려있단다. 거기서 살아도 돼. 우리 집에 아주 꾹 눌러살아라. 언제까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