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7년 차 사서다. 이곳에서만 14년을 근무했다.
딱히 사서가 꿈이었던 건 아니다. 아니, 나는 정확히 사서가 어떤 직업인지도 몰랐다. 그 시절, 그 나이 때가 그렇듯이 그냥 대학에 가는 게 목표였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그러니까 성적이 맞는) 학과 중에 국문학, 영문학 이런 학과보다 조금 더 나아 보여(취직이 좀 잘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결정했다. 이런 어리석은 선택에도 불구하고, 요즈음의 나는 내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매우 높다. 참으로 운이 좋은 경우라고 할 수밖에.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책벌레까지는 아니었어도 늘 책이 가까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책이 다양하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집에 전래동화전집, 위인전집 같은 무슨무슨 전집류가 많았던 덕이다. 중학교에 입학하니 도서관이 있었다. 친구들과 놀이 삼아 재미 삼아 도서관을 들락날락했다. 이해도 못하면서 서양 고전을 읽었고, 최인호의 '겨울나그네'같은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들의 사랑에 가슴 설레며 눈물짓기도 했다. 책이 내 삶 속으로 깊숙하게 들어오게 된 것은 대학생이 되고 난 이후부터다. 딱히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나는, 친구들과 술 먹는 것도 지겨워질 무렵 책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시절엔 시간이 남아돌았다. 자취방에 TV도 없던 시절이었다. 수업시간에도 강의는 듣지 않으니 온통 남는 시간이었다. 세상 고민 다 짊어진 듯 우울한 청춘이었던 나는, 전공책은 놓고 다녀도 일기장과 책 한 권을 꼭 들고 다니며 틈만 나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물론 강의 시간에도. 이런 나를 보고 그 시절 친구들은 '작가'라고 놀렸다. 음악 듣고, 영화 보고, 책 읽고, 글 쓰는 일상. 때론 미친년처럼 즐겁고, 때론 극단적으로 암울하고 우울했던 그때 그 무료한 시간들을 책 읽고 글 쓰며 버텨냈다.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감수성이나 가치관, 신념의 70% 이상은 아마도 저 때 완성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후 책 읽기는 습관이 되었다. 저 습관은 지금까지도 쭈욱 이어져, 나는 매일 조금씩이라도 책을 읽는다. 집이고 직장이고, 언제 어디서든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책이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워낙 호기심이 많고 모험심이 뛰어나 수많은 취미들이 나를 스쳐갔지만, 결코 질리지도 물리지도 않는 것은 책 읽기 뿐이었다. 책을 빼고는 나를 설명할 길이 없다.
전공 공부와 담을 쌓았던 내가 도서관에서 일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졸업 후 우연히 만난 전공 교수가 '내가 도서관에서 일하는 것'이 가장 놀라운 일이라고도 했다. 그만큼 나는 날라리였다. 취직한 이후에도 사서가 적성이 아닌 것 같아, 중간에 잠깐 한눈을 팔았으나,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나는 결국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가끔 생각한다. 그렇게 도서관을 벗어나고자 애썼는데 이 무슨 조화 속인가. 답은 한 가지다. 바로 '책'. '책'에 대한 사랑이 나를 이렇게 이끌었다. 적응하기 어려웠던 신입시절(낯을 많이 가려 사람 상대하는 것이 벅찼다)에도, 사무실에 짱 박혀 'DB구축'만 해야 했을 때도(정말 단순하고 반복적인 지겨운 일이다), 책을 만질 수 있고 책 옆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 순간순간 행복했다. 우연하게 발견한 책이 '내 인생의 책'이 되는 경험은 또 어떠한가. 도서관에서 일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행운이다.
사서로서의 내 직업인생이 즐겁기만 했던 건 아니다. 진지하게 이직을 고민한 적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업에 만족도가 제법 높은 이유 또한 책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독서토론을 진행한 지 7년 차다. 대학원에서 공부한 것이 아까워 독서치료를, 읽은 책들을 활용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독서토론을 진행했다. 올해는 몇 년 전부터 별러왔던 새 프로그램을(1년에 20권 읽기 프로젝트/독서논술 경시대회) 론칭(?) 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다 책에 대한 사랑이 밑바탕이 되어,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책을 좀 더 가까이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시작한 일이다.
내 도전이 가치 있었던 것은 자발적이었다는 데에 있다. 먼저 하겠다고 손을 든 일이 시간이 지나고 연륜이 쌓이면서 내 업무가 되었다. 말하자면, 내가 스스로 개척한 업무다. 지시에 의해 시작된 업무가 아니고, 대체할 인력이 없다 보니, 이 업무에 있어서 만큼은 독립성이 보장된다. 게다가 보람이 상당하다. 내가 하는 일이 가치 있는 일임을 믿는다. 얼마 전에 예전에 독서치료에 참가했던 학생이 찾아온 일이 있었다. 내 덕에 그나마 성격이 많이 변했다며, 고맙다는 말을 건넨다. 이번 학기 독서토론을 진행하면서 벽에 부딪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그 친구 말에 기운을 얻어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직장생활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독립성이 보장되고 보람을 느끼는 업무가 많지 않다는 것을. 직업적 자긍심이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오래전 과거의 남자 친구가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 많은 지식을 다 쓰지도 못하면서, 너는 왜 책을 그렇게 많이 읽는 거니?' 도끼로 머리를 한대 쿵 맞은 느낌이었다. 그때까지 책을 많이 읽었다는 사실은 은연중 내 자부심이었다. 누구도 나에게 왜 책을 많이 읽는 건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사실 어떤 책은 읽었다는 사실조차도 기억 못 할 때가 있지 않은가. 그 날 이후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책을 읽는 건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삶이 많이 달라졌을 거라는 것.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라는 것.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나마 이 정도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건, 다 책 때문이라는 것. 책 말고는 나를 성장시키고 변화시키는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는 것.
직장인들이 모두 그렇듯 앞으로의 내 직장생활이 순조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여전히 힘들고 지겹고 또 회의도 많이 들겠지. 그래도 나에게는 책이 있고, 책을 매개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앞으로도 계속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다. 또한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재능이자, 곧 나의 삶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사서 17년 차에 이르러,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된 나의 직업적 소명이다.
나는 17년 차 사서다. 나는 책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