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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길냥이들을 소개합니다

by 달의 깃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꽃, 김춘수 -


발에 차이는 것이 길냥이다. 길 가다가 누구나 한 번쯤 마주쳤을 것이다. 그들은 이름이 없다. 그저 길냥이로 통칭해서 부를 뿐이다. 탄생을 기뻐하는 사람도 없고,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는 이도 없다. 길냥이 평균수명은 3년이다. 짧은 생을 살다가 사라지는 운명이다. 이런 길냥이들에게도 관심을 주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이름을 붙여주고 밥을 주고 눈을 맞춘다. 거기서 기적이 일어난다. 그 순간부터 길냥이들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는 것처럼'


마당 있는 집에 살기 전까지 나에게 길냥이는 그냥 그런, 없는 듯한 존재였다. 아니, 고백건대 '도둑고양이'라고 했다가, 고양이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핀잔을 들었을 정도로 무관심했다. 그랬던 내가 마당이 있는 집에 살게 된 후 길냥이들의 세계에 눈을 떴다. 나는 이제 길냥이에서 -무늬만 이지만- 집냥이가 된 우리 뭉치와, 수많은 길냥이들의 '어멍'이 되었다. 우리 집에서 마주치는 길냥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밥을 주고 눈을 맞춘다.


그렇게 알게 된 길냥이들이 이제 열 마리가 되었다. '알콩이, 몽이, 쿵이, 심이, 늘보, 그레이, 태희, 테디, 찐빵이, 반점이' 누구도 이들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과거의 내가 그랬듯, 길에서 스치듯 만나는 그저 그런 길냥이일 뿐인 것이다. 길냥이들을 알고 교감하게 되면서, 이들의 존재에 특별히 의미를 더해주고 싶어 졌다. 그래서, 우리 집 길냥이들에 대해 글을 쓴다. 이름을 한 번 더 부르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KakaoTalk_Moim_4YaDCqny7BeVAPGov0cbdA9uWTD3G1.jpg 우리 집 뒷마당은 길냥이들의 놀이터랍니다. 밥도 먹고 낮잠도 자고 놀기도 하고, 뭐 가끔 싸움도 나고요 ㅎㅎ

늘보는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아이다. 움직임이 길냥이 답지 않게 너무 느려 '늘보'가 되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털이 꼬질꼬질하고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것이 나이가 많은 수컷 치즈 냥이다. 비교적 다른 길냥이들에게 관대하고 성품이 온순해 보이는, 산전수전 다 겪은 할아버지 포스다. 음식을 양보하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보일러실에 만들어 놓은 집에서 자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떤 때는 매일, 어떤 때는 며칠에 한 번씩 꼭 눈도장을 찍는다. 나하고는 2미터 거리부터 시작해서 30센티까지 가까워졌다. 기분 좋을 때는 손가락 잠깐 닿는 것 정도는 허용해 주기도 한다. 늘보는 나의 30센티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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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뒷마당에서 낮잠을 즐기더군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데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알콩이는 죽기 직전에 구조해서 입양 보낸 알록이의 새끼다. 집냥이 뺨치도록 개냥이 었던, 출신성분이 의심스러운 엄마 알록이와는 다르게 경계가 심한 오리지널 길냥이다. 한 5개월 때부터 보았고 엄마에게 버림받는 것도 보았다. 그래서인지 더 애틋하다. 어릴 때는 겁이 많아 날 보고 도망가는 게 일이었는데, 요즘은 2미터 친구가 되었다. 유심히 지켜보면 곁만 허락을 안 할 뿐 은근슬쩍 고양이스럽게(안 따라다니는 척하며) 나를 따라다닌다. 아침마다 대나무 숲에서 울기만 하던 것이 몇 개월 전인데, 우리 알콩이가 이제 어른이 다 되었다. 얼마 전부터는 뭉치의 아들 몽이와 단짝이 되어서는, 아침마다 2인 1조로 나를 기다린다. 둘이 사귀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자세히 보면 알콩이가 몽이를 졸졸 따른다. 꽤나 적극적이다. 소심해 보이는 알콩이는 알고 보면 사랑 앞에서는 적극적인 '걸 크러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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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마당 장작위에 올라가 있는 걸 좋아한답니다. 알콩이는 새침데기 같은 얼굴이 매력적인 고양이죠.

몽이는 우리 뭉치의 남아 새끼다. 처음부터 경계가 그리 심하지 않았고, 몇 번의 만남 후에 나에게 배까지 허락한 쉬운 남자다. 뭉치 배에서 나왔건만 애교는 뭉치보다 훨씬 더 많다. 예를 들어 뭉치는 담 밖에서 날 만나면 도망간다. 어이없다. 반면 몽이는 내가 부르면 저기 멀리서도 따라온다. 진정 누가 우리 집 냥이인 건지. 또 뭉치는 머리 아래는 만지면 문다. 많이 물렸다. 몽이는 아무리 조물딱 거려도 그저 좋단다. 절대 배를 보여주지 않는 뭉치에 비해 배를 까뒤집는 것도 예사다. 이렇게 나를 따르니 보쌈해서 납치해가고 싶을 만큼 예쁘고 사랑스럽다. 특히 요즘 들어 알콩이와 함께 다니는데, 둘을 보는 내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이쯤 되면 콩이와 몽이 커플은 길냥이가 아니라 우리 집 마당 냥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나도 내심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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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나가면 저기서 둘이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싸복이 남매는 콩이몽이 커플을 보면 아주 못잡아먹어서 환장이죠 ㅋㅋ

쿵이와 심이는 뭉치의 또 다른 새끼다. 둘 다 암컷이고 중성화 수술을 마쳤다. 몽이와는 딴판으로 둘 다 나를 경계한다. 심이는 수술시켜 준 후 딱 한 번 보았다. 우연히 앞집을 지나가다 보았는데 고상하고 우아하게 마당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는 중이었다. 심이는 쿵이나 몽이와 다르게 언제 봐도 고상함과 귀티가 흐른다. 분위기가 제법 엄마 뭉치를 닮았다. 쿵이는 심이보다는 자주 보는 편이다. 며칠에 한 번씩은 나타나 통조림을 내놓으라고 (어이없을 정도로) 곡소리를 낸다. 꼭 나한테 통조림을 맡겨놓은 것처럼. 예기치 않게 수술이 늦어져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새끼를 낳았다. 새끼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빠작 마르고 몰골이 말이 아니어서 늘 안쓰럽다. 어딘가에서 새끼를 키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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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이는 너무 작고 말라 볼 때마다 너무 안쓰러워요 ㅠㅠ 반면 심이는 뭔지 모르게 여유있어 보여요.

태희는 고등어라고 불리는 테비 종이다. 역시 어릴 때부터 보았다. 늘 36계 줄행랑을 치는 통에 대나무 숲에 숨어있는 걸 몇 번 보았을 뿐이다. 조금 크자 대범해져 눈에 종종 띄게 되었고, 어느 순간 보았을 때는 배가 남산만 해 있었다. 5월 중순쯤에 새끼를 낳은 듯하다. 7월쯤에는 수술 예정이다(왠지 아주 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다). 새끼는 어디에 낳았는지 도통 모르겠고, 만삭일 때부터는 배가 고파서인지 우리 집에서 자주 보았다. 요즘은 아예 사료그릇 앞에서 혹은 급식대 위에서 진을 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밥 주러 가면 도망가면서도 하악질을 멈추지 않는다. 요런 시건방진 녀석. 내가 밥을 주는 냥이 중에 나에게 하악질을 하는 건 요 녀석뿐이다. 김태희가 울고 갈 만큼 예쁘다는 의미에서 '태희'라고 이름 붙였는데, 도도하기 짝이 없는 것이 참으로 이름 한 번 잘 지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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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태희 찾기' 대나무숲에 숨은 태희를 찾아보세요. 이거 뭐, 보호색 수준이군요 ㅎㅎ

테디 역시 고등어다. 처음엔 솔직히 태희와 헷갈렸다. 시간이 흐른 후, 그 넘이 그 넘이 아니라, 별개의 2마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테디는 수컷이다. 수컷이란 걸 알게 된 순간, 이름이 테디가 되었고, 기존의 테디는 '태희'가 되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태희와 헷갈렸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닮지 않았다. 시크하고 도도해 보이는 것이 매력이다. 내 자동차 밑을 좋아하고 우리 집 근처에 사는 것 같고, 몽이와 콩이 커플과 종종 함께 다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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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고도 경계는 하지만 이젠 줄행랑을 치진 않아요. 테디야~ 우리 그새 많이 친해진 거 맞지? 그지?

반점이는 하얀색 바탕에 커다란 검은 점이 있어서 이름이 반점이가 되었다. 길냥이에게 관심을 갖게 되기 전부터 보았으니, 역사로 치면 가장 오래된 냥이다. 하지만 늘 36계 줄행랑이기 때문에 제대로 본 적은 없다. 수컷인 것도 최근에 비로소 확인했다. 나는 반점이가 우리 뭉치를 임신시키지 않았나 의심 중이다. 딴 동네 냥이가 와서 임신시켰을 리는 없고, 새끼들이 엄마는 하나도 닮지 않고 다 까맣고 하얀 걸 보면 분명 아빠가 그렇단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에 까맣고 하얀 애는 반점이 뿐이다. 반점이 너~ 네가 뭉치 임신시킨 거 맞지? 너지?


찐빵이는 치즈 수컷 냥이다. 처음엔 늘보와 구분이 어려워(둘 다 치즈 냥이므로) 늘보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다른 냥이라는 걸 알았다. 늘보보다 얼굴이 좀 더 넙적하고 둥글어 찐빵이라고 지었다. 우리 집 길냥이들 중에 가장 호전적이다. 아니, 다른 냥이들과는 잘 지내지만 늘보에게만 호전적이다. 가끔 두 마리가 곡소리를 내며 싸울 때가 있어 나가 보면 찐빵이와 늘보가 대치 중이다. 늘보가 성품이 유순한 걸 생각해보면, 먼저 싸움을 거는 쪽은 찐빵이 같다. 가끔 한 밤중에 싸워대서 나의 단잠을 깨우기도 한다.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싸워대므로 꼭 나가서 '싸우지 말라고~' 고함을 한 번 질러줘야 한다. 아주 가지가지한다.


다운로드.jpg 반점이와 찐빵이. 둘 다 '36계 길냥이' 인지라 정말 어렵게 찍은 사진이랍니다. ㅎㅎ

그레이는 말 그대로 '회색'이다. 동네에서 우연히 보고는 색깔이 비슷해서 처음엔 우리 뭉치인 줄 알았다. 역시 사람 보면 도망가기 바쁜 전형적인 길냥이인지라 가까이서 본 적은 없는데, 자세히 보면 우리 뭉치보다 2배는 덩치가 크다. 눈도 동글, 얼굴도 동글, 어깨도 딱 벌어진 것이 기골이 장대하다. 장군감이다. 최근에야 낯이 익은 녀석인데, 앞으로 좀 더 친해졌으면 한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수컷이다. 휴우~


KakaoTalk_20180614_165055879.jpg 자세히 보면 꽤 매력적인 아이예요. 앞으로 친해지자꾸나~

엊그제 일이다. 몽이랑 노닥거리는 중이었는데 어느새 슬그머니 몽이가 낮잠을 청한다. 이럴 때마다 늘 2미터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알콩이도 어느 새부터 졸기 시작한다. 둘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30센티 거리를 두고 둘이서 함께 낮잠을 자다가, 어느 순간 몽이가 알콩이에게로 다가가 머리를 맞댄다. 마법 같은 순간이다. 높고 맑은 하늘, 바람 따라 바스락거리는 대나무 숲,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2마리의 길냥이. 그때 그 순간 우리 집 뒷마당의 풍경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뭐라고 표현하면 될까. 그때 우리 셋 사이에 흐르던 그 공기를.


꼭 이럴 땐 핸드폰이 없다. 아쉽게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하면 어떠랴.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새겨진 느낌일 텐데. 길냥이들을 알고 교감하게 되면서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나는 결코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돌아가고 싶지 않다. 누가 길냥이를 보잘것없다고 했던가. 이들은 모두 내게 너무나도 특별하고 의미 있는 존재들이다. 나는 열 마리 길냥이 들의 어멍이다.


KakaoTalk_Moim_4YaDCqny7BeVAPGov0cbdA9uWTTyFP.jpg 뭉치 근황을 궁금해하신 분을 위해 올립니다. 길냥이들 밥 줄 때마다 나와서 꼭 훼방 놓는 뭉치 모습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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