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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Apr 29. 2020

육아, 더 깊어지는 시간

육아는 나를 잃는 시간이 아니었다.



엄마라는 직무는 한동안 모든 자유를 박탈했고, 나는 육아에 아주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했다. 아이 때문에 아무것도 못한다며 울부짖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얻은 것이 얼마나 많은가. 육아의 기쁨이 어쩌고, 사랑 나부랭이 블라블라를 떠나서, 아이를 키우는 시간은 진짜로 나를 성장시켰다. 나는 아이 덕분에 평생 몰랐던 나의 기질을 발견했다. 내 마음속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마주하고 위로했다. 아이를 키우며 글쓰는 취미가 생겼으며, 육아 카페를 운영하며 커뮤니티 운영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사람의 심리와 내면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도 육아 덕분에 알아낸 보물이다. 여전히 나는 밤에 아이와 함께 잠들어 버리면 아쉽고, 아이와 함께 있는 낮에 무언가 하고 싶은 욕구가 올라오면 괴롭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이 시간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또 이루고 있다.


엄마들은 아이의 좁고 제한된 세상에 머물며, 치열하게 사회생활하는 동안 생각치 못한 진짜 나를 발견한다. 내가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하는지, 내가 어떨 때 분노하고 어떨 때 만족하는지, 내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고 어디서부터 무너지는지, 나는 어떤 욕구가 강하며 어떤 감정을 숨기고 살았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엄마가 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나.


타인에 대해서도 배운다. 날 것 그대로의 기질대로 사는 아이를 보며 사람마다 타고난 성격의 틀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모든 사람은 다르며, 그 차이를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누군가의 행동에 대해서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육아라는 것은 극한의 경험들의 집합체이다. 극도의 행복과 극도의 우울감을 동시에 느끼며 깊은 자아성찰과 감정조절의 세계로 엄마들을 안내한다. 생전 못하던 일들에도 도전해야 하고, 평생 기피하던 일들과도 마주쳐야 한다. 한계에 부딪쳐도 아이로부터 도망칠 수 없기에 어떻게든 돌파할 방법을 찾는다. 몸근육, 마음근육, 뇌근육까지 혹독하게 훈련이 된다. 내 안에 있는 모든 자원을 하나도 빠짐없이 총동원하게 만들어 나를 밀어올린다. 엄마들은 아이를 키우며 바보가 된 거 같다고 말하지만, 인지적으로는 정체할지 몰라도 비인지능력은 몰라보게 발달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려 애쓰는 회복탄력성, 인내, 메타인지, 문제해결력, 자기조절력 등이 길러지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격적으로 성숙해진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에서는 인생의 전반부에서 여러 경험을 쌓으며 지내다가 뒤늦게 한곳에 정착한 늦깎이 제너럴리스트들의 성공에 주목한다. 천천히 올라간 사람들이 더 성공적일 수 있다는 내용이다. 성장하면서 다양한 경험과 관점을 받아들인 제너럴리스트는 폭넓은 견문과 관심사를 바탕으로 창의성을 발휘하고 보다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한다. 전혀 다른 분야의 지식을 연결하고 유추하고 종합하는 데 탁월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엄마들이 떠올랐다. 제너럴리스트가 되기에 육아만큼 적합한 훈련이 또 어디 있겠는가. 아이를 키우려면 숲도 보고 나무도 봐야 한다. 환경도 살펴야 하고 나와 아이의 내면도 놓쳐선 안 된다. 때로는 감성을 발휘하고 때로는 이성을 내세워야 한다. 가끔은 몸을 움직이고 가끔은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밀어붙일 때를 알고 물러설 때를 배운다. 발달 전문가는 아이의 발달에 집중하고 학습 전문가는 아이의 공부에 집중하지만 엄마는 이 모든 걸 두루두루 살피는 제너럴리스트가 돼야 한다. 아이의 정서, 발달, 생활습관, 사회성, 학습, 건강 등 뭐 하나 놓칠 수가 없는 노릇. 엄마들은 계속해서 이 모든 분야를 연결하고 종합한다. 하루하루가 제너럴리스트 훈련이다.


난 그동안 엄마로서의 정체감에 충실했다. 내 인생이 뒷전이어서가 아닌, 육아라는 깊이 있는 경험이 주는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키워낸다는 건 정말이지 귀한 일이다. 그 어떤 스펙보다 나를 더 깊고 알차고 단단하게 만든다. 이 시간에 충실할 수 있다면 앞으로 못할 게 없겠단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나는 모른다. 분명한 건 육아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 얼핏 보기엔 잃은 게 많아 보이지만 전에 없던 내실이 생겼다는 것.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되든, 그것이 소소한 일이든 거창한 일이든, 나는 한층 깊어진 통찰력을 발휘하리란 것.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그에 맞게 행복한 일상을 꾸려나가리란 것. 점차 내 일상에 나의 비중이 커져가는 시점. 나는 이제 내 앞날을 고민해 보려 한다. 현재의 나는 이전보다 믿음직스럽다. 키워 줘서 고마워,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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