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그리고 나를
나는 예민한 아이었다. 남편은 불안한 아이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했다. 나는 예민함을 숨기며 살았고, 남편은 불안을 저주로 여겼었다. 그랬던 우리가 서로를 만나 우리의 모습을 반씩 닮은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예민하고 불안했으나 그 자체로 너무나 사랑스러운 한 영혼이었다. 키우기 어려운 아이었지만 다시 태어나도 이 모습 그대로의 내 아이를 만나고 싶었다. 그게 너니까. 너는 그 모습 그대로 내게 최고의 존재니까.
아이 덕분에 남편과 나는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됐다. 아이 마음을 파악하기 위해 많은 대화를 나눴고, 맘속 깊이 숨겨져 있던 상처들을 마주했다. 연애만 10년 하고 결혼했는데도 남편은 내가 얼마나 예민한 사람인지 몰랐고 나 역시 남편이 그토록 불안한 사람인지 몰랐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도 몰랐다. 사회적으로 다스려진 성격으로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육아로 인한 자아성찰 덕분에, 언제나 우리의 날개를 꺾고 발목을 잡고 끌어내리던 블랙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특정한 불운한 사건도 아니었으며 누군가의 잘못도 아니었으며, 더 재밌는 건 예민함이나 불안함이라는 기질 특성 자체도 아니었다. 우리가 내내 힘들었던 이유는 우리의 타고난 모습을 꾸밈없이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내면아이를 깊게 들여다 보았다. 처음으로 우리의 기질을 언어로 정의하고 설명했다. 처음으로 민낯의 감정들을 숨김없이 끄집어내 드러내고 이해받았다. 모두 첫 경험이었다. 타고난 모습 그대로 수용받고 사랑받은 경험은 우리의 날개가 되었다. 아이로 인해 시작했지만 우리 인생에도 터닝포인트가 됐다. 남편은 이제야 비로소 삶의 주체가 된 기분이라 말한다. 우리는 어쩌면 아이를 통해 서로의 심리치료사가 됐는지도 모른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니 얼마나 든든한가.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너밖에 없어’라는 남편의 말에서 그동안의 고생이 느껴진다. 또한 아이의 기질을 수용하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자 외치는 나의 육아 방향성이 옳다는 확신이 든다. 우리가 돌아돌아 삼사십년만에 물리친 블랙홀, 네 맘속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도록 사랑으로 꽉꽉 채워줄 테야.
워싱턴 대학의 미샤 리네한은 부모가 아이의 기질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아이를 부모 입맛대로 바꾸려고 하면 아이는 자신의 고유한 기질적 정서반응을 수용하지 못하고 회피하거나 통제하려 한다. 마음 속에서 힘겨운 분투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바람직한 성격 발달을 방해하고 다양한 정신병리와 부적응까지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 거기까지 안 가더라도, 가장 편안해야 할 부모 앞에서조차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아이의 상처가 얼마나 클지, 자존감이 얼마나 상할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의 불안함을 수용해주면 아이는 덜 불안해한다. 아이의 예민함을 인정해줄 때 아이는 덜 예민해진다.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 거겠지. 아이 마음속에 부모라는 안전기지가 자리잡는 거겠지.
많은 부모들이 아이의 ‘행복’을 육아의 목표로 말한다. 그 첫걸음은 부모가 아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된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그것인지도 모른다. 소모적인 내적갈등 없이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맘껏 펼칠 수 있다니, 감격스럽지 않은가.
오늘도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인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