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루 멀어져간다
정신없이 살다 보니 눈깜짝할새 아이는 한살씩 자랐다. 육아하는 하루하루는 긴데, 일년은 왜 이리 쏜살 같은지. 기지도 못하던 녀석이 방방 뛰어다니고, 옹알이도 못하던 녀석이 쫑알쫑알 입이 쉬질 않는다. 어릴 때 그토록 좋아했던 인형들을 쳐다도 안 보고, 손때 묻은 장난감들을 아무렇지 않게 버리라고 한다. 백번은 족히 읽어줬던 아기책은 기억도 안 난다네. 정말? 이거 네가 얼마나 좋아했던 건데, 엄마랑 이렇게저렇게 엄청 놀았잖아. 이 인형은 네가 너무 좋아해서 차 탈 때마다 갖고 나갔잖아. 이 책은 네가 잘 때마다 갖고 오던 건데… 아이는 어깨를 으쓱할 뿐 시큰둥하다. 뭐야, 내 머릿속엔 그 모든 기억들이 생생히 반짝이고 있는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아기에서 어린이로 변하는 과도기가 가장 애달팠다. 숨막히게 사랑스러운 나의 아가와 영영 이별하는 느낌이라 덜컥 겁이 나곤 했다. 아, 진짜 얼마 안 남았구나. 두손 가득 움켜쥐어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한줌의 모래알처럼, 너와의 시간이 조금씩 달아나는 거 같았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조금씩 잊혀져 가고, 또 하루 멀어져 가고, 너와 매일 이별하고 살고 있다는 게, 알고 있었지만 왠지 나와 상관없는 얘기처럼 느껴졌던 것들이 한꺼번에 정신없이 후두두 몰려왔다. 에잇, 쿨해야 하는데. 어쩌겠어, 난 원래 쿨하지 못한 사람이야. 난 무지 뜨거운 사람이라고. 네가 나를 이렇게 길들여 놨잖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그러나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축구장에서 땀흘리는 네 모습이 이렇게 멋지리라고. 엄마를 도와 라면을 끓이는 모습이 이토록 기특하리라고. 서로 개그를 던지며 깔깔거리는 시간이 이만큼 즐거우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아장아장 동글동글 아기곰 같던 너는 사라졌지만, 어느새 내 허리만큼 키가 큰 꽤나 듬직한 녀석이 곁에 있다. 엄마는 요리를 못한다고 능글맞게 놀리며 나를 발끈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배를 잡고 웃는다. 할 얘기가 많아진다. 개구진 눈빛을 교환하는 시간이 늘어간다. 때로는 신경질을 내며 싸우기도 하고, 그러다 스리슬쩍 간식을 먹으며 화해한다. 제법 내 고민상담도 잘해 준다. 생각치도 못한 현명한 답으로 나를 놀라게 할 때가 있다. 이쪽저쪽 등을 긁어달라며 들이민다. 여전히 작디작은 네 등인데, 보이지 않는 네 마음과 생각은 몸보다 훨씬 많이 자랐구나.
이 모습으로 내 곁에 있을 날도 많지 않겠지. 금새 자라서 그때는 어린이도 아닌 한발짝 멀어진 소년, 청년의 모습으로 서로의 삶 어딘가에 함께 있겠지. 나와는 어떤 관계려나. 엄마가 너무 좋아 어쩔줄 모르는 이 진하디 진한 사랑은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은 걸 알기에 아깝고 귀하다.
하루하루 어제의 너와 이별만 하지만, 하루하루 내일의 너를 만나고 있다. 어린 너와의 헤어짐은 아쉽지만, 자라는 너의 새로운 모습들에 가슴이 설렌다. 훌쩍 커서 내 품을 떠난 너를 상상해 본다. 내가 없는 너만의 세상, 아쉽지만은 않다. 친구들과 여행을 가는, 아르바이트에 도전하는, 여자친구를 다정히 챙기는 너를 보며 내 가슴은 또 벅차게 행복할 거 같다. 언젠가 네가 널 닮은 아이를 낳는다면, 우린 또 할 얘기가 많아지겠지. 그 아이를 보며 어린 너를 떠올리겠지. 그날이 오면, 너와 나의 진했던 이 시절의 추억을 다시 꺼내어보자. 네 머나먼 기억속에도 젊은 엄마와의 시간이 좋은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