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재 Feb 16. 2021

육아가 힘들었던 진짜 이유





엄마들이 자식을 떠올릴 때 뇌에서 활성화되는 부위는 자기자신을 떠올릴 때 활성화되는 부위와 동일하다고 한다. 남편이나 부모 등 다른 가족을 떠올릴 때는 그렇지 않다고 하니, 엄마들이 본인과 자식을 동일시한다는 근거가 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자존감이 높은 엄마는, 즉 자기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행복한 엄마는 육아가 덜 힘들다. 그런데 자존감이 낮은, 즉 자기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고 상처가 많은 엄마는 육아가 더 힘들다. 불안에 시달려본 엄마는 아이가 불안함을 느낄까 봐 전전긍긍한다. 외로움에 사무쳐 본 엄마는 아이가 외로울까봐 아이를 놓지 못한다. 가슴 아프게 울어본 엄마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심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낀다. 잔잔한 호수 같은 마음의 밭에 돌맹이를 던져 잠시 물결이 이는 것과, 늘 파도로 요동치는 험란한 바다 같은 마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아이의 정서를 섬세히 케어하는 건 아주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마가 지나치게 고통스럽다면 적신호다.


엄마들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어린시절을 아이에게 투영한다. 아이의 감정에 매우 민감하게 이입된다면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지금 아이의 마음에 공감하고 있는가, 아니면 깊숙한 곳에 묻어둔 나의 아픔이 꿈틀대고 있는가. 아이를 키우다 보면 숨겨놨던 형형색색의 상처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그래서 엄마들은 아프다.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더 많이 아프다. 그런데 또 이때가 묵은 상처들을 치유할 절호의 기회라고 하니 묘하다.


“왜 나의 단점을 닮았니?”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이 아이에게 보일 때 난 몹시 불안했다. 예를 들자면, 나는 심리적으로 무척 예민하여 평범한 일상에서도 에너지 소모가 심한 편이다. 희로애락을 강렬하게 느껴 쉽게 감정에 압도되고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느라 피로하다. 이 점을 아이가 닮았다는 걸 알았을 때 절망스러웠다. 나처럼 피곤하게 살겠구나 싶어서. 하지만 만약 내가 내 예민함을 누리며 살았다면 어땠을까. 슬픔보다 환희를 느낄 일이 훨씬 많았더라면, 혼자 눈치 볼 일보다 함께 사랑할 일이 훨씬 많았더라면. 그래도 나는 민감한 너의 모습에 속상했을까? 아니, 오히려 기뻤을 것이다. 나처럼 많은 기쁨과 사랑에 충만하게 살겠구나, 너와 함께 세상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싶다, 하며 아이의 예민함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 테지.


“왜 나의 장점을 닮지 못했니?”


별명이 애어른이었을 만큼 나는 독립적인 아이었다. 바쁜 엄마를 대신해 동생을 챙기고, 학교에서도 늘 모범생이었으며, 떼 한번 부린 적 없을 정도로 의젓하게 자랐다. 이로 인해 칭찬을 많이 받다 보니 ‘독립적인 아이’라는 게 곧 나의 자랑스러운 정체성이 되었다. 그런데 내 아이는 달랐다. 뭐든 ‘엄마가, 엄마가’라며 의존적인 모습을 보였다. 독립심은 내 가장 큰 무기였기에, 이를 갖추지 않은 아이를 보면 마음이 불편해지며 부정적 회로가 돌아가더라. 아이가 놀아달라고 할 때마다 ‘왜 혼자 놀지 못할까, 왜 이렇게 의존적일까, 너 그래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래!’라며 비합리적으로 불안한 사고가 증폭된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는 제 나이대로 아이답게 살 뿐인데. 나의 삶이 정답이 아닌데. 아이는 나와 다른 자원을 가진 개별적 존재인데. 내 아이는 나와 다른 사람이고,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이를 인식하고 난 뒤로 놀랍도록 아이와의 시간이 편해졌다. 아이가 심심하다고 보챌 때에 가슴이 답답해지던 증상이 사라졌다. 나도 모르게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쓰였던 에너지가 낭비되지 않으니, 남는 에너지는 고스란히 아이와 웃고 노는 데에 쓰일 수 있었다.


결국 나를 아프게 하는 건 나였다. 내 마음에는 에너지 블랙홀이 있었으며, 육아가 계속해서 이를 자극했던 것이다. 마음속에 블랙홀이 있느냐 없느냐는 육아의 질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내 마음속 얽힌 실타래를 풀어야 아이를 편안히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행복한 엄마가 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그 여정은 나를 행복한 엄마를 넘어, 보다 행복한 사람으로 이끌어줬다. 


신은 왜 이렇게 육아를 힘들게 만들었을까, 고민해 본 적이 있다. 아담과 하와가 그놈의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대대손손 힘들어야 하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나. 어쩌면 나는 그 답을 찾은 것 같다. 신은 우리에게 묵은 상처를 털어낼 기회를 주신 거였다.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은 그 어떤 동기보다 강력했다. 육아가 계속 내 마음 깊숙한 곳을 자극해 준 덕에, 나는 마주하기 아파서 덮어놓고 외면했던 마음속 블랙홀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엄마가 되지 않았더라면 평생 떨치지 못했을, 콕콕 찔리면서도 그냥저냥 안고 살아갔을 그 가시들은 내가 미처 흘리지 못했던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나에게 필요했던 건 위로였다. 울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대신해 충분히 슬퍼해주고 충분히 울어주고 충분히 내 자신을 위로했을 때, 비로소 시끄러웠던 마음이 고요해짐을 느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요즘 엄마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