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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Apr 04. 2021

나에게 다정한 내가 되길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생각이 많은 편인데,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며 조언을 구하는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워낙 사랑스러운 친구라 곁에 좋은 사람이 많구나, 다른 사람들 의견을 귀담아들을 줄 아니 참 현명하네’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잠깐, 나도 저런 사람인데? 나도 감성이 넘치고 생각이 많은데, 왜 그런 내 모습은 예뻐 보이지 않지? 나도 친구들 조언을 잘 구하는데, 왜 나는 주관이 없다며 자책하게 되지?


이상했다.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하지? 놀랍게도 나는 나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다. 외려 천대했다. 서슴없이 비난하며 일순위로 질책했다. 아이가 아파도 내 탓, 남편이 아파도 내 탓, 내가 아파도 내 탓. 아이가 우울해도 내 탓, 남편이 우울해도 내 탓, 내가 우울해도 내 탓. 입밖으로 내뱉을 필요도 없이 내 안에서 뭉개뭉개 떠오르는 비난의 말들은 맘놓고 신랄해져갔다. 누구든 욕을 들으면 우울하기 마련인데, 내가 내게 그러고 있었다니.



만약 사랑하는 친구가 아이에게 버럭했다며 괴로워하면 아마 이렇게 위로할 것이다. “네가 얼마나 지쳤으면 그랬겠니. 내가 아는 너는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인데. 네 힘으로 어쩔 수 없었던거니 자책하지 마. 평소에 충분히 잘하잖아! 그 정도로 깨질 애착이 아니야.”


친구가 살이 쪄서 속상해 한다면 이렇게 말해 주겠지. “아이 키우느라 스스로를 돌볼 틈이 없었잖아. 그리고 너 지금도 되게 예뻐! 진짜 몰라? 잔뜩 꾸미고 다니던 대학생 시절보다 지금의 성숙한 모습이 더 예쁜 거 같아!”


친구가 다른 학부모들과 트러블이 생겼다면 이렇게 말해 줄 테다. “뭐야, 그 사람들 너 질투하는 거 아니야? 너 진실되고 합리적인 사람이잖아. 네가 그럴 만하니까 그랬겠지. 신경쓰지 마, 네 잘못 아니야.”

한글자도 빠짐없이 진심일테다. 힘들어하는 친구가 안쓰러울 테고, 친구 편에 서서 짐을 나눠들어주고 싶을 거다. 제일 전해주고싶은 메시지는 단연 ‘너의 탓이 아니야’일 거다.



그러나 나에게는 어떤가? 내가 아이에게 화낸 건 내 성질머리가 더러운 탓이고, 내가 살찐 건 내가 게으른 탓이고, 내가 누군가와 갈등을 겪는다면 내가 미성숙한 탓이다. 아 뭐야, 그 어떤 악질의 상사도 천하의 원수도 이 정도로 노골적으로 상대를 비난하지는 않겠는걸.


왜일까, 남에게는 관대하나 나에게는 엄격한 이유가 뭘까?


누구나 마음속에 ‘내면의 비판자’가 산다. 내면의 비판자는 내 안에 상주하며 끊임없이 태클을 거는 존재다. 끊임없는 자기 검열, 지독한 불안, 혹독한 완벽주의, 모두 그의 역할이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 내면의 비판자는 걱정이 많았다. 더 완벽하라며, 더 열심히 하라며, 더 인내하라며 나를 몰아세웠다. “너, 아이를 울렸어? 그러고도 네가 좋은 엄마야?”, “애한테 소리 질렀어? 미친 거 아니야? 애가 잘못 크면 다 너 때문이야!”


내면의 비판자가 날뛰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아껴서이다. 실수하지 말라며, 발전하라며, 더 잘하라며 채찍질하는 것. 아마도 지금껏 얘 덕을 많이 봤을 것이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할 수 있었고, 좋은 엄마가 되겠단 책임감으로 육아에 대해 공부하며 아이를 보다 잘 키울 수 있었다. 이렇듯 내 안의 비판자는 나름대로 나를 위한다고 위하고 있다. 마냥 미워하기에는 얘도 억울하다.


“고마워, 네가 열일해 준 덕에 내가 이만큼 자랄 수 있었어. 그동안 나를 지켜주려 애쓴 거 알아. 이제 걱정 마, 좀 쉬어도 돼. 네가 필요할 때면 다시 부를 테니, 그때 다시 나를 도와줄래?”



비판자가 아닌 친구가 되는 연습을 하고 있다. 단순하다. 어린 시절 어른들에게 듣고 싶었던 말, 학창시절 친구들에게 듣고 싶었던 말, 지금 남편에게 듣고 싶은 말, 바로 그 말들을 내가 나에게 해 주면 된다. 넘어진 나에게 ‘아휴, 이 바보야’라며 질책하는 대신 ‘괜찮아? 아프진 않니?’라고 말해 주는 친절함. 상처받은 나에게 ‘네가 뭔가 잘못했겠지’라며 비난하는 대신 ‘괜찮아, 최선을 다했잖아’라고 위로해 주는 다정함.


별거 아닌 거 같은데, 효과는 놀랍도록 좋았다. 아이에게 하듯 나에게도 다정한 어투를 쓴다. 오래된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어렵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나를 좀 더 사랑하는 나로, 나의 친구인 나로, 나에게 상처주지 않는 나로. 내가 나의 편이 되어 준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위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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