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 3년 살기

뇨냐에서 노동자로

by 희재

사실 자카르타에 오기 전부터 학점은행제로 보육교사 과정을 듣고 있었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친척이 데이케어 교사로 영주권을 딸 수 있다고 해서 준비했던 것인데

자카르타에서 한참 즐겁게 지내는 시점에 지금 영주권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고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캐나다로 오라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WES(국제학력인증센터)를 통해 자격증을 변환시키고 ㅡ지금은 캐나다에 거주해야만 변환된다고 알고 있다ㅡ 남편과 자카르타 인연들과 이별을 하고 자카르타를 떠나는 비행기에서 눈물을 흘리며 아이와 나는 한국으로 뿔랑 했다.(이제 뿔랑을 함께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음에 기쁘다.)


그리고 캐나다를 향해 떠났다. 도착 다음 날 범죄기록증명서를 발급받고 응급처치교육을 이틀 들은 뒤 수료증을 들고 친척이 소개해준 데이케어에 발런티어(봉사자)로 바로 일을 시작했다.

때는 12월, 눈이 많이 오는 날 첫 출근과 동시에 삽을 들고 사십 분간 눈을 치웠다.

하루아침에 사가 짐도 들어주는 뇨냐(부인)에서 삽을 들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된 것이다. 하락된 신분으로 하루하루가 즐겁지 않았다. 아이들은 귀여웠으나 세 살짜리 애도 나보다 영어를 잘했다.


그래도 왔으니 어쩔 수 없지 하며 경험자에게 들은

데이케어 교사 취업 성공팁로 아이들 이름을 외우 아이들과 동료교사들과 친해지려 애쓰고 눈치껏 다른 교사가 필요한 일을 다.


노란 머리를 하고 웃음소리가 특이했던 이란에서 온 실습생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내게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한국은 전쟁도 안 하는데 왜 이민을 오려하냐고.

옆 반 교사 파니쉬는 국적이 기억 안 나는데 본인 나라에는 신발이 비싸다며 가족들 신발을 사서 휴가 기간 동안 고으로 간다며 자기도 초반에 향수병이 있었기에 나를 이해한다고 위로해 주었다.

같은 반 소말리아에서 난민으로 온 교사는 주말에 한 쇼핑몰 신발가게에서 마주쳤다. 평일엔 데이케어 교사, 주말엔 신발가게 직원이었던 것이다. 친한 사이는 아니기에 갑자기 손님이 된 나는 어색하게 신발을 둘러보고 내일 보자고 인사를 했다. 그 일 이후 그녀는 소말리아에서 올린 결혼식 사진과 아직 공부 중이라 함께 못 온 새신랑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소말리아 하늘이 파랗고 아름다워 놀랐다.


나보다 절실하게 온 사람들을 보며 나는 여기 왜 있지라는 생각과 지금 이게 맞나 싶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국에서 들고 간 화려한 자료와 경력직 친척의 도움으로 시범수업을 하고 2월 1일부터 정식교사로 일하고 워크비자 lmia도 지원해 준다는 좋은 소식을 들었지만 두려움이 앞섰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자카르타에서 급성후두염으로 입원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파서 먹지도 말도 잘 못하는 남편의 전화에 그날 바로 비행기 티켓을 변경하고 한국에 하루 있다가 다시 자카르타로 돌아갔다.


그 당시 가족의 소중함을 소 느꼈다.

물도 공기도 깨끗하고 영어권 선진국인데 그게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캐나다와는 반대로 물도 공기도 더럽고 인니어 쓰는 후진국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남편과 자카르타 사람들이 보고 싶었다.


학교도 마침 2월 1일이 개학이었다. 그렇게 나는 운명의 선택길에서 다시 방향을 틀고 개학날 자연스레 합류하였다.


이것이 나의 짧은 캐나다 경험이다.

가끔 후회는 된다. 지금쯤 영주권이 나왔겠지 하면서.

하지만 고통 속에서 얻은 영주권이었으리라.


자카르타 돌아와 두 번째 해를 맞으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골든아워를 들으며

'그래 지금이 나의 황금기야!'

자카르타를 더욱더 즐겨보자로 마음을 바꾸었다.



JVKE - Golden hour

https://youtu.be/UsR08cY8k0A?si=qhsTR_pZs9IZ3P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