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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Jan 24. 2022

작가님이 우리 엄마 같아서

한 살 어린 '여배우' 출연자가 딸내미가 되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내가 담당한 건 세 팀이었다.

나이 지긋하신 연기자 선생님, 운동선수, 여배우

그중 여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보통 사전 촬영 전에 인터뷰를 하려고 통화를 한다.

여배우의 경우에는 매니저에게 내 번호를 전달해,

스케줄이 끝나고 전화를 걸어 달라 부탁을 했었다.

그리고 퇴근 때까지 연락이 오지 않아서

퇴근을 하던 중에 버스 안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차가운 목소리가 전해져 올 때.

처음 든 생각은 친해지기 어렵겠다. 였다.

일하자고 만나 모두 친할 순 없으니

맡은 일만 잘 하면 되지. 했는데

이어지는 그녀의 말이 놀라웠다.


"저 지금까지 했던 어떤 프로그램보다 진심이에요.

 이거 진짜 열심히 할 거예요. 많이 도와주세요."


그 말투가 너무 진심이어서

버스에서 내리던 나는 발을 헛디딜 뻔했다.

예상과 다른 전개, 나는 또 과몰입하겠구나.


직전에 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하면서

작가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었다.

단 한번 승패에 누군가는 운명이 바뀌는 경쟁.

제작진은 누구의 편도 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누굴 맡으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기우니

이중적인 고민 안에서 답을 찾아야 했다.


나는 그저 믿음직한 바닥이 되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요리를 하는 친구에게 힘껏 내리쳐도 되는 도마가 되고

춤을 추는 친구에게는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 플로어가 되겠다고

언제까지 살아남을진 모르지만 떨어지는 순간까지

안심하고 사활을 걸 수 있는 버팀목이 되겠다고.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개인 스케줄을 하면서도 방송을 위한 연습 외에

기본기를 기르겠다며 추가 시간을 들였다.  

그러나 내가 맡은 연예인은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응원은 할 수 없었다. 그저 지켜볼 뿐.

그러다가 중반을 지나.

개인의 사연을 담은 미션을 하는 중이었는데

그녀는 연습 중 다리 근육이 찢어져서

치료를 받고 오는 길이었다.

촬영을 위한 발레 학원에서 만나

그녀에게 준비한 토슈즈와 발레복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이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너무... 오랜만이에요.


토슈즈를 묶는 그녀의 손이 떨렸다.

발레복을 입고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 춤추는 내내

표정이 아련해지던 그녀는

인터뷰를 하면서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한참 같이 울며 인터뷰를 마치고 나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냥 안아주어야 할 것 같았다.

너무너무 사랑하던 발레를 엄마의 가벼운 주머니 때문에 그만둬야 했던

초등학생이 앞에서 울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몇 번, 연습하는 곳에 불쑥 찾아갔다.

음료수를 바닥에 내려놓고 한참 말없이 보고 있는데

그녀가 다가오더니 말했다.

"나, 작가님이 우리 엄마 같아."


어린 시절 자신을 발레 학원에 넣어놓고

밖에서 지켜보던 엄마 같다며

연습하다 말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그녀.

그렇게 나는 나이가  한 살 어리고 키는 20센티 큰,  

예쁜 여배우 딸내미가 하나 생겼다.


이후로 10년이 지났다.

나는 아직도 그녀를 딸로 부른다.

그녀도 아직 나를 마미라고 부른다.

모든 출연자가 그녀와 나 같은 관계가 되진 않지만

가끔 이렇게, 마음이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결국 방송도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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