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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릴 믿어 봐, 꼭 이기고 올게

댄스 서바이벌 작가를 하다

by 희재


서바이벌 프로그램 특별히 좋아한 건 아니었는데, 작가 기간을 돌아보면 적지 않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했다.

모델 서바이벌로 시작해 카레이서 서바이벌, 뷰티서바이벌, 슈퍼 모델 대회, 댄스 서바이벌, 요리 서바이벌, 음악 서바이벌, 추리게임 서바이벌.....

그 중 기억에 남는 건 당시 생방송으로 꽤 반응이 뜨거웠던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작가들이 담당으로 몇 명씩을 맡는데 내가 맡은 사람은 세 팀이었다. 중견 배우 W, 여배우 Y, 운동선수 S.

특히 그 중 여배우인 Y와 그녀의 파트너는 스케줄을 비우고 기본기 부터 다시 나머지 공부를 하며 대단한 기세로 헤쳐나갔고 대부분의 미션에서 1위 자리를 놓지 않더니 어느새 결승을 앞두고 있었다. 상대는 탑 아이돌 그룹의 멤버였는데 이제와 말하자면 백 프로 질 거라고 생각했다.

복불복으로 고른 우리 팀의 곡이 (내가 듣기에는) 상대 팀보다 훨씬 별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사위원 점수야 그렇다 쳐도 생방송 투표에서 아이돌을 이길 수 있을까?

심지어 우리 팀은 남,여 선수 둘 다 여기저기 심각한 부상을 입은 후였다. 음악도 별로, 몸 상태도 나쁨... 나는 객관적인 시선 유지에 실패해 속상함을 드러냈다.

"지금까지만 해도 대단해. 솔직히 나는.. 음악 때문에 좀 속상하지만 뭘 해드릴 수 없어서 미안해요. "

그런데, 프로였던 남자 선수에게서 의외의 말이 돌아왔다.

"우리 음악 하나도 안 아쉬워. 춤으로 더 꽉꽉 채울 거니까 작가님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보다 백 배 좋을 거예요 분명히!"


그렇게 결승날이 왔다. 방송국에 도착해보니 상대팀 테이블에는 그 팀의 담당 선배가 사 온 커다란 화환이 놓여있었다.

나도 큰 거 뭐 할 걸.. 우리팀 괜히 더 기죽는 거 아닌가. 그 때 꽃보다 화려했던 나의 그녀가 연이은 부상에 푸석푸석해진 얼굴로 들어왔다.

저 얼굴로 춤을 어떻게 춰. 발목도 다치고 허벅지 햄스트링이 다 나갔다는데.. 승패를 떠나 아픈 걸 뻔히 아는데도 무대에 세울 생각을 하니 속상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기도한 묵주를 내밀었다. 결과를 떠나. 무리하다 다치지만 말아달라고 열심히 준비한 것만 다 보여달라고 했다.

나보다 20센치는 족히 큰 두 사람은 나를 꼭 안고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작가님만 믿으라며. 오늘은 우릴 믿어봐. 꼭 이기고 올게!! "

나도, 여배우인 그녀도, 파트너인 남자 선수도 눈가가 촉촉해졌다. 진짜 한 팀이 된 기분이었다.


그 방송에서 나의 업무는 생방송 투표 실황에 맞게 MC 대본을 고쳐 쓰고 넘겨주는 일이었다.

인터컴으로 들려오는 실시간 순위와 상황을 실수 없이 정리해서 멘트로 만들어 줘야 하는 거였는데, 사실 나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인터컴 안으로 들리는 소리가 자꾸 멀게 느껴졌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중간 순위 보고가 끝나고 최종 집계 결과를 적어야 할 시간. 피디님의 목소리가 인터컴 안으로 들려왔다.

"최종 결과 전달합니다. 우승자는...!"


나의 그녀와 그가,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우승 트로피를 받았다.

사적인 감정으로 응원하면서도 전체 진행을 위해 공평함을 유지해야 하는 나역시 긴장이 풀어지니 슬며시 눈물이 났다.

생방송을 마치고 회식을 하러 고기 집에 몰려간 백여명 가까운 사람들은 서로 끌어안고 울고 불고 하다 아침이 되어 흩어졌고

그렇게 또 하나의 프로그램을 끝냈다.


일본 소설 암리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배우인 주인공은, 작품을 찍을 때면 동료 배우들과 현장 스태프들과 가족이나 애인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가

끝나면 마치 누군가 죽은 것처럼. 안 볼 사이가 되는 관계에 익숙해져 버린 것 같다고.

프로그램을 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하루 종일 전화하고, 지겹게 싸우면 꽤 정이 들어버리지만

막상 일이 끝나면 싹둑, 이별 통보를 받는 것처럼 자라난 마음을 각자 추스려야 한다.

감정을 많이 쏟은 사람은 그만큼을 꿰매야 한다. 그게 룰이다.


종방 후 며칠이 지났다. 이번에도 혼자 과몰입했어, 너무 쓸데없이 마음을 많이 쏟았지.. 하면서

지난 흔적을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작가님, 왜 나한테 연락 안 해. 우리 다음 주 미션 얘기 왜 안 해, 왜 아직 미션 안 나와!!"


수화기 넘어로 그녀가 울고 있었다. 우승한 기쁨보다 다시 못하는 게 아쉽고 슬프다고

우리가 함께 만든 시간이 너무 그립다고.

차갑게 생겨서 온 마음을 쏟은 여배우와 끝내 냉정함 유지에 실패한 담당 작가가 같이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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