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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Jan 25. 2022

믿어 봐, 꼭 이기고 올게

세상에서 가장 든든했던 서바이벌 출연자의 말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한 두개 한 건 아닌데

당시 그 프로그램의 반응은 유독 뜨거웠다.

내가 맡은 출연자인 그녀와 그녀의 파트너는 대단한 기세로 헤쳐나갔고

거의 모든 미션에서 1위 자리를 놓지 않더니

어느새 결승을 앞두고 있었다.

상대는 탑 아이돌 그룹의 멤버였다.

이제와 말하자면 백 프로 질 거라고 생각했다.  

복불복으로 고른 우리의 곡이

(내 기분엔) 상대 팀보다 훨씬 별로였다.

게다가 심사위원 점수야 그렇다 쳐도

생방송 투표에서 아이돌을 이길 수 있을까?

게다가 우리 팀은 여기저기 심각한 부상을 입은 후였다.

조건도 별로, 몸 상태도 나쁨... 나는 속상함을 숨기는 것에 실패했다.

"우리 끝까지 열심히 해 봐요. 솔직히 음악 나는.. 좀 속상한데..

  제가 뭘 해드릴 수 없어서 미안해요. "


그런데, 두 사람에게서 의외의 말이 돌아왔다.

"우리 음악 하나도 안 아쉬워요.

 춤으로 꽉 채울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보다 백 배 좋을 거예요 분명히!"


결승날이 왔다.  방송국에 도착해보니 상대팀 테이블에는

담당 선배가 사 온 커다란 화환이 놓여있었다.

화려한 꽃 향기에 기죽어 있는 찰나

꽃보다 화려했던 그녀가 부상 때문인지 푸석푸석해진 얼굴로 들어왔다.

속상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기도한 묵주를 내밀었다.

그리고 결과를 떠나. 무리하다 다치지만 말아달라고

열심히 준비한 것만 다 보여달라고 했다.

나보다 20센치는 족히 큰 두 사람은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작가님만 믿으라면서. 오늘은 우리 믿어봐. 꼭 이기고 올게!! "


나도, 여배우인 그녀도, 파트너인 남자 출연자도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제야 진짜 한 팀이 된 기분이었다.


생방송에서 나는 실황에 맞게 MC 대본을 쓰고 넘겨야 했다.

순위와 상황을 실시간으로 정리해 적는 일이었고

생방송에 특화된 나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인터컴 안으로 들리는 소리도 멀게 느껴졌다.

중간 순위 보고가 끝나고 최종 집계 결과를 기다리는데

피디님의 목소리가 인터컴 안으로 들려왔다.

"최종 결과 전달합니다. 우승자는...!"


나의 그와 그녀가 우승 트로피를 받았다.


생방송을 마치고 백여명 가까운 사람들은

고기집에 몰려가 울며 불며 회식을 하고 아침이 되어서야 헤어졌고

나도 그렇게 또 하나의 방송을 끝냈다.


일본 소설 암리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배우인 주인공은, 작품을 찍을 때면 동료 배우들과 현장 스태프들과

가족이나 애인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가

끝나면 마치 누군가 죽은 것처럼. 안 볼 사이가 되는 관계에 익숙해져 버린 것 같다고.

나는 그 글이 현실적이라고 느꼈다.

죽은 것처럼. 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싹둑, 이별 통보를 받는 것처럼

몇 개월 동안 자라난 마음이 갑자기 둘 데 없어지는 게

감정을 많이쓰는 나같은 사람에겐 쉽지 않으니까.

다만 이곳은 일터고, 각자 미련은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 추슬러야 하는 것일 뿐.


애끓던 서바이벌 프로그램 종방 후 며칠이 지났다.

역시, 혼자 쓸데없이 마음을 많이 쏟았지.. 하면서

지난 흔적을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작가님, 왜 나한테 연락 안 해요.

 우리 다음 주 미션 얘기 왜 안 해, 왜 아직 미션이 안 나와!!"


그녀가 울고 있었다. 이렇게 끝나는 게 너무 아쉽다고.

우승한 기쁨보다 더 이상 못하는 상황이 슬프다고

우리가 함께 만든 시간이 너무 그립다고.


프로그램하는 동안 나보다 더 몰입했던

내가 마음을 쏟은 것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 준.

차가울 것 같지만 너무나 따뜻한 그녀와

이번에도 냉정함 유지에 실패한 내가

전화 너머로 같이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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