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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소녀를 상냥하게 만들라니요

MBC 라디오 캠페인 편집 아르바이트를 하다

by 희재


대학시절 엄마가 말했다. 너같은 애가 있긴 하냐? 직장인도 이거보단 나을걸, 밤낮도 없어, 방학도 없어. 어떻게 그래?

그랬다. 그 때의 나는 헤르미온느 같았다. 복수 전공까지 수업 19학점. 교내 방송국에서 한 시간짜리 생방송 다섯 개. 영상 촬영과 편집하는 뉴스 방송 두 편. 학내 공간인 음악감상실 아르바이트. 분기별로 방송제 준비, 졸업은 위한 영어 공부, 여의도까지 작가교육원 다니기.. 주말도 방학도 쉬는 날 없이 밤까지 뚝딱거리다 들어왔다.

어떻게 그렇게 했나, 뭘 위해 그렇게 까지 했나 싶지만 그냥 교내 방송국에서 뭔가를 만드는 자체가 재미있었다.

그 때 방송국 조교였던 신희선배는 이미 교양 작가가 되어 있었는데, 나는 선배를 졸졸 따라다니며 모르는 걸 집요하게 물어보곤 했다.

겨울 방학이던 어느 날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너 캠페인 편집 알바 하나 할래?" 그건 잠깐만~으로 시작하는 57분 라디오 캠페인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 해본 적은 없지만, 어떻게든 해 볼게요. 그 어떻게의 방법을 알아내는 건 다음 문제였다


무작정 음향 편집 프로그램인 골든 웨이브를 다운 받고 시험 해 보고 있는데 선배가 녹음한 인터뷰 원본 파일을 보내왔다.

미션은 굶고 있던 노숙자에게 빵을 건네어 화제된 ‘크라운베이커리’ 소녀의 인터뷰를 기승전결 있고 콤팩트하게 3분내로 만들라는 거였다.

오케이. 알겠슴다 하고 녹음파일을 듣는데, 잠깐만..? 왜 말 끝이 다 짧니..?

선행을 했다는 소녀의 문장이 반말로 끝나고 있었다. 분명히 착한 친구 맞는데. 말투가 시작부터 끝까지 - 했어, 그랬잖아, 그랬어....라니.

선배님 이 친구가 뭘 하는지 알고 말 한 건가요. 멘트 편집은 한다 쳐도, 건방진 소녀를 상냥하게 만들 수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선배도 난색이었다. 그러게 그 날은 생각도 못했는데 큰일 났네, 인터뷰를 다시 딸 시간은 없고... 일단 최대한 어떻게 해봐.

최대한 어떻게.... 이럴 경우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정 자신없으면 못하겠다고 하던가. 해 보고싶으면 어떻게 든 해 내던가.

하겠다고 했으면 해야지. 고민 끝에 내가 찾은 방법은 ‘존댓말로 끝나는 걸 찾아내서 자연스럽게 뒤에 종결어미로 붙여 보자, 였다.

그리고 반복해서 녹음본을 들으며 기도했다. 얘야 , 부탁이다. 딱 한 번만 존댓말을 써 다오.

그리고 찾아냈다. 미세하지만 확실한 한 번의 존댓말, 됐다. 이것으로 소녀는 상냥해질 수 있겠어!!

나는 그 한 번의 어미를, 어요, 요로 나누어 소녀의 말 끝을 모두 수정했다. 부자연 스러운 건 미완결 형으로 문장을 새로 만들었다.

고도의 수술이 필요했지만, 공들여 완성한 소녀의 캠페인은 라디오로 무사히 방송 되었고 힘들었던 만큼 뿌듯함이 몰려왔다.

소녀야 집요한 나에게, 그리고 너 자신에게 감사하렴.

아니었다면 통편집이 됐거나, 착한 일하고 청취자에게 반말하는 이상한 소녀가 되었을 거야...

그게 나의 지상파 콘텐츠 첫 작업이다. 라디오 전파를 타고 흐른 3분의 캠페인.

대학생인 나는 할 줄 몰랐지만 의지로 덤볐고, 그 열의는 또 다른 은인과 기회를 만들어 냈고

그 때 얼렁뚱땅 배운 오디오 편집은 이후에도 꽤 유용하게 쓰였다.

까다롭고 댓가 적은 일은 귀찮게 느껴져 대충하거나 포기하기 쉽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어려운 일을 스스로 끝내면 반드시 중요한 순간에 무기가 된다.

이후로도 작가 생활하는 동안 나는 오디오, 비디오 편집 모두 남보다 훨씬 예민하게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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