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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Jan 13. 2022

건방진 소녀 상냥하게 만들기

라디오 캠페인 편집 아르바이트를 하다


대학시절, 엄마가 말했다. 너같은 애가 있긴 하냐?

직장인도 이거보단 나을걸,

밤낮도 없어, 방학도 없어. 어떻게 그래?


그랬다. 그 때의 나는 시간 마법을 쓰는 헤르미온느 같았다.

복수 전공 수업 19학점. 교내 방송국에서 한 시간짜리 생방송 다섯 개. 영상 촬영과 편집하는 뉴스 방송 두 편. 학내 공간인 음악감상실 아르바이트. 분기별로 방송제 준비까지 주말도 방학도 쉬는 날 없이 밤까지 뚝딱거리다 들어왔다.


어떻게 그렇게 했나, 뭘 위해 그렇게 까지 했나 싶지만

나는 그저 방송을 만드는 자체가 재미있었다.

그 때 교양작가가 된 학교 방송국 조교 언니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는데 어느 겨울,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너 캠페인 편집 알바 하나 할래?"

잠깐만~으로 시작하는 라디오 캠페인.

선배는 알바비가 적다며  미안해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대답은 무조건 할게요.

방법을 알아내는 건 다음이었다.


처음 보는 음향 편집 툴을 뚝딱거리고 있는데

선배가 녹음한 인터뷰 파일을 보내왔다.

굶고 있던 노숙자에게 빵을 건네는 선행을 베풀어

화제된 소녀의 인터뷰를 기승전결 있고 콤팩트하게 만들라는 거였다. 오케이. 하고 녹음파일을 듣는데,  

잠깐 소녀야...? 왜 말 끝이 다 짧니..?

선행한 소녀의 문장이 반말로 끝나고 있었다.

내용은  착한데. 분명히 착한 친구 맞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 했어, 그랬잖아, 그랬어....


선배님 멘트 편집은 할 수 있겠는데

건방진 소녀를 상냥하게 만들 순 없겠는데요..

선배도 난색이었다. 큰일 났네,

인터뷰 다시 딸 시간은 없고...최대한 어떻게 해봐.  


최대한 어떻게.... 네. 하면 되죠..


위기에서 선택은 명료하다.

 하던가. 아니면 어떻게든 해 내야지.

나는 빠른 고민을 시작했다.

선행은 했지만 말투가 건방진 소녀를

어떻게 상냥한 소녀로 만들 수 있을까.


하루 종일 녹음본을 들었다.

부탁이야. 소녀야. 딱 한 번만 존댓말을 써 다오.

그리고 찾아냈다. 미세하지만 확실한 한 번의 존댓말 어미.

- 어요. 됐다. 이것으로 소녀는 상냥해질 수 있어!!


나는 그 한 번의 - 어요, 로 소녀의 말 끝을 모두 수정했다.

부자연 스러운 부분은 미완결 형으로 자르면서.

고도의 수술이 필요했지만, 가능한 게 어디야.

공들여 완성한 소녀의 캠페인은

라디오로 무사히 방송 되었고

나는 뿌듯함과 동시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고마워. 소녀야 자신에게도 감사하렴.

아니었다면 착한 일하고 반말로 캠페인하는

이상한 선행 소녀가 되었을 거야...


그게 아마도 지상파 첫 제작의 기억일 것이다.

전파를 타고 흐른 아웃풋.

대학생인 나는 아무 것도 할 줄 몰랐고

그거 어떻게든 하려는 의지 뿐이었다.

그리고 의지는 은인을 만들어 주었다.

언니는 귀찮을 때 까지 조교실을 드나드는 나를

언제나 반겨주었고. 먼저 본 세상에 대해 설명해 주셨고

손을 뻗을 수 있는 곳에 불러 만져볼 수 있도록 도와 주셨다.

덕분에 무엇이 될지도 모르던 나는

작가를 하려면 교육원에 가야하는 걸 알았고

얼렁뚱땅 배운 오디오 편집도 훗날 작가하는 내내 유용하게 쓰였다. 그게 앞날 쓰일 거라는 걸, 그 때는 몰랐지만.


까다롭고 댓가도 적은 일이 귀찮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시련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

기억하자. 그것은 반드시 중요한 순간에 무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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