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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희재
Jan 13. 2022
가진 게 없다면 방법은 하나
고등학생 시절, 신민아와 임수정 사이에서 패션잡지 화보를 찍다
고등학생이 된 나에게는
매달 가슴 두근거릴 정도의 보석상자가 있었다.
바로 패션잡지.
쎄씨 (CeCi)와 키키(KiKi), 신디 더 퍼키, 유행통신 등의 패션 잡지는
인터넷이 활발하지 않던 시절의 여고생에게
패션, 뷰티, 가십, 문화, 스타 소식까지 알 수 있는
유튜브이자, 포털사이트, SNS 그 이상이었다.
잡지 가격을 훌쩍 웃도는 메이크업 부록과 굿즈로
공짜 화장품까지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매달 손꼽아 기다릴 수 밖에.
그러나 잡지가 나오는 날 내가 제일 먼저 펴는 페이지는
패션도 메이크업도, 인터뷰도 아닌
편집장의 소감과 에디터들의 한 마디였다.
아무렇지 않게 적힌 에디터라는 단어가 빛나 보였고
마감하느라 죽을 뻔했다는 그 말이
프로페셔널한 이들의 투정같아 부럽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이 번뜩 뜨이는 글을 발견했다.
'고등학생 에디터에 지원하세요'
CeCi와 kiki를 발간하는 중앙 M&B 에서 낸 공고였다.
고등학생 에디터로 뽑히면
기자들과 아이템 회의를 하면서
활동비도 받고 잡지도 무료로 볼 수 있다니.
학교에서 나름 에디터 위치인 교지편집부를 하던 나는
그날로 친구에게 잡지를 빌려 밤새 리뷰를 쓰고 잡지사에 보냈다.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이건
내 자리다 싶었다.
얼마 후, 중앙 M&B 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을 거쳐 최종합격을 했다는.
변두리 고등학교에 다니는 나로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연히 친구들도 믿지 않았다. 잡지에 이름과 학교가 실린 걸 보고 다른 반 친구들도
진짜냐며 찾아올 정도였으니까.
고등학생 에디터의 일은 잡지기사의 모니터링과 피드백,
그리고 새로운 기획 아이디어를 내는 일이었다.
친구들에게 두툼한 설문조사지를 나눠주고
수합해서 잡지사에 정기 회의를 가고
기자 언니들과 둘러앉아 지난 호에 대한 정리를 하며
새로운 달에 하면 좋을 아이템에 대해 의견을 냈다.
나는 늘 한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서
기자 언니들 옆에 앉아 하는 일을 지켜보곤 했다.
바쁘게 취재하는 언니. 영어 원서를 읽으며 웃는 언니,
심플하고 패셔너블했던 편집장님, 자리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화장품과 옷들. 모두 눈부시게 빛나는 것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담당기자 언니가 연락이 왔다.
"
독자모델 한 번
해라. 모델료도 있고, 화장품도 챙겨줄
게
"
진짜.. 그렇게 말하시면 안 할 수가 없잖아요.
조그맣게 나와야 해요.. 아셨죠..?
그렇게, 또 어쩌다 하게 됐다. 팔자에 없는 잡지 모델을.
스튜디오에 촬영
가던 날은 안개비가 흩뿌렸다.
곱슬머리인 나에게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부슬부슬 일어나는 잔머리를 꾹꾹 눌러 피며
중앙 M&B 건물 지하 스튜디오로 들어서자
심장을 쿵쿵 울리는 커다란 음악소리와 함께
포토그래퍼의 시험 슛이 진행 중이었다.
문틈으로 보이는 다른 스튜디오에선
잡지에서나 보던 모델들이 화보를 찍고 있었다.
"진짜 주시는 거예요?? 우와. 고맙습니다~!"
해맑게 웃으면서 스튜디오를 나오던 여자는
당시 가장 인기가 많았던 모델 '양민아'.
(그렇다.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의 '신민아'다.)
샘플을 선물로 받았는지 신나서 들고
팔랑팔랑 나오는 게 너무 사랑스러웠다.
어디 봐서
쟤가
중학교 3학년이야...
얼굴은 주먹만 한데 눈 코 입이 다 있네? 예쁘다~
미모에 놀라 두리번거리고 있는 사이
기자 언니는 나를 끌고 분장실로 데려갔다.
제대로 된 메이크업 경험이 없는 나는
불
켜진 화장대를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분장실 의자 가운데 자리에 앉으면 된다고 했다.
거울에 보이는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 밥 주문할 건데 뭐 드실래요?"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니
양민아가 보조개를 움푹 패며 생글생글 물어본다...
.
애써 담담하게 대답하고 앉는데..
"언니는 뭐 드실래요?"
양민아가 나 말고 물어본 '언니'는
오른쪽에 앉아 메이크업을 받던 사람이었다.
얼굴을 그때 처음 봤다.
너무너무 작은 얼굴.임수정이었다.
그렇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임수정.
'검블유'의 그 임수정.
머리가 큰 편은 아닌데, 작진 않아도 표준은 되는데.
양민아와 임수정 사이는 너무하잖아?
유난히 얼굴 작은 두 모델 사이에 앉아있으니
대두도 이런 대두가 따로 없었다.
양민아는 면봉으로 파운데이션 한 번 덜어서
얼굴 전체에 펴 바르는데
나는 왼쪽 볼 바르고 나니까 없는. 그런 느낌..??
촬영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정신없이 많이 갈아입었고,
스타일리스트가 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던 기억뿐.
찍는 동안 지켜보고 있는 예쁜 모델들을 보며
주눅은 좀 들었던 것 같다.
그때 안간힘을 쓰며 생각했다. 기죽지 말자고.
오늘
쟤들과 같은 일을 하고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져
마무리할 즈음 칭찬을 받으며 촬영을 끝냈다.
끝나고 기자 언니한테 물어봤었다.
당시 고등학생 에디터가
꽤
많았고
난 키도 작고 눈에 띄게 예쁜 편도 아니었는데.
왜 나에게 연락
했느냐고.
그랬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눈에 든 이유는 단 하나 밖에 없다.
나는 가진 울타리 밖으로 나가기 위해
늘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매일 한 시간 일찍 갔고.
모니터링 리뷰를 깜지처럼 쓰고 아이템을 숙제처럼
내고
어른
되어 다시 보면 신기한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이었
다.
그걸 누가
받아들여 주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
다.
여유는 있는 사람이 부리는 거지,
배경도 뭣도 없는 사람에게 방법은 단 하나다.
전력으로 돌진하는 것.
그러니, 누군가
현실에 불평하고 있다면
조언한다.
할 수 있는 만큼 맹렬히 돌진해보라고.
어디선가,
누군가
그런
당신을 보고 있을 테고
그 불꽃은
어느 순간
피어오를지 모른다고.
나 역시
치열함을
예쁘게 봐 준 그 때
기자언니들 덕분에
동경하던 연예인들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컸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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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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