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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게 없으면 방법은 딱 하나

신민아와 임수정 사이에서 KIKI 화보를 찍다

by 희재


쎄씨 (CeCi)와 키키(KiKi), 신디 더 퍼키, 유행통신 등의 패션 잡지는 인터넷 없던 시절의 90년대 여고생에겐 보물 상자였다. 패션, 뷰티, 가십, 문화는 물론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기사를 읽을 수 있고, 잡지 가격을 웃도는 공짜 화장품까지 얻을 기회였으니 다들 매달 손꼽아 기다릴 수 밖에. 우리는 서로 다른 잡지를 사서 순번을 정해 돌려 보았다.

잡지가 나오는 날 내가 제일 먼저 펴는 페이지는 패션도 메이크업도, 인터뷰도 아닌 편집장 소감과 에디터들의 한 마디였다. 왠지 아무렇지 않게 적힌 에디터라는 단어가 빛나 보였고 마감하느라 죽을 뻔했다는 그 말이 프로의 투정같아 부럽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에게 빌린 잡지를 읽다가 눈이 번뜩 뜨이는 글을 발견했다. '고등학생 에디터에 지원하세요' 쎄씨와 키키를 발간하는 중앙 M&B 에서 낸 공고였다.

고등학생 에디터로 뽑히면 기자들과 아이템 회의를 하면서 활동비도 받고 잡지도 무료로 볼 수 있다니!! 그 때의 나는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이건 내 자리다 싶었다. 전혀 안 될거라는 걱정을 하지 않고, 이미 에디터가 된 것 처럼 밤새 빽빽하게 리뷰를 쓰고 잡지사에 보냈다.

얼마 후, 중앙 M&B 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을 거쳐 최종합격 했다는 거였다. 세상에 이게 진짜 되네? 나도 놀랐지만 동경의 눈으로 잡지를 보던 친구들도 충격을 받았다. 이름과 학교가 실린 걸 본 다른 반 친구들도 줄줄이 찾아왔으니까. 니가 신청한게 맞아? 진짜 너 맞아? 어떻게 한거야? 라는 질문이 쏟아졌다. 그러게 말야 ..어쩌다 보니 됐네.


고등학생 에디터가 하는 일은 매주 발간되는 잡지기사의 모니터링을 하고 친구들에게서 설문한 피드백을 주면서 새로운 기획 아이디어를 내는 일이었다.

친구들에게 매달 두툼한 설문조사지를 나눠주고 수합해서 잡지사에 정기 회의를 가고 기자 언니들과 둘러앉아 지난 호 정리를 하는 일이 나는 너무 즐거웠다.

회의 날이면 한 시간 일찍 도착해서 기자 언니들 옆에 앉아 하는 일을 지켜보곤 했다. 바쁘게 취재하는. 영어 원서를 읽으며 웃고 있는, 테스트할 샘플을 챙겨 나가는,

심플하고 패셔너블했던, 기자들과 편집장님의 자리마다 수북하게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화장품과 옷들. 그 시절 나에겐 모두 눈부시게 빛나는 것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담당기자 언니가 연락이 왔다. "너 독자모델 한 번 해라. 모델료도 있고, 화장품 챙겨줄게"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익숙해 질만도 한데 예나 지금이나 나는 카메라가 무섭다. 그런데, 돈도 화장품도 주겠다니요. 그렇게 말하시면 안 할 수가 없잖아요.

언니 진짜 저 얼굴 조그맣게 나와야 해요.. 아셨죠..? 라고 몇 번을 당부하며 또 어쩌다 보니 독자 모델로 잡지에 실리게 됐다.


소공동에 있는 중앙 M&B 건물로 촬영에 가던 날은 안개비가 흩뿌렸다. 곱슬머리인 나로선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부슬부슬 일어나는 잔머리를 꾹꾹 눌러 피며 건물 지하 스튜디오로 들어서자 심장을 쿵쿵 울리는 커다란 음악소리와 함께 포토그래퍼의 테스트 슛이 진행 중이었다.

문틈으로 보이는 다른 스튜디오에선 매달 잡지에서 보던 모델들이 화보를 찍고 있었다.

"진짜 저 주시는 거예요?? 우와. 고맙습니다~!"

그 때 내 앞으로 해맑게 웃으면서 스튜디오를 나오던 여자는 당시 가장 인기가 많았던 모델 '양민아'. (그렇다. 김우빈의 그녀 신민아'다.)

가방인지 옷인지 샘플을 선물로 받고는 신나서 팔랑팔랑 나오는 게 너무 사랑스러웠다.

쟤 중학교 3학년이라는데, 너무 예쁘다. 얼굴은 주먹만 한데 눈 코 입이 다 있네?

미모에 놀라 두리번거리고 있는 나를 기자 언니는 분장실로 데려갔다. 메이크업을 제대로 해 본적 없었던 나는 노란 조명이 아련하게 빛나는 화장대를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 개의 자리가 있는 분장실의 가운데 자리에 나를 앉혀 놓고서, 언니는 베이스 바르고 있어! 하며 밖으로 나갔다.

거울에 보이는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 저기... 밥 주문할 건데 뭐 드실래요?"

소리가 나는 곳을 왼쪽을 돌아보니 양민아가 보조개를 움푹 패며 생글생글 물어본다.... 애써 담담하게 대답하고 앉는데..

"언니는요, 뭐 드실래요?"

으응? 나이는 양민아보다 내가 두 살 많지만 설마 나를 언니라고 한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니었다. 양민아가 나 말고 물어본 '언니'는

내 오른쪽 자리에 앉아 메이크업을 받던 사람이었다, 그때 처음 얼굴을 봤다. 너무너무 작은 얼굴. 임수정이었다.

(그렇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차무혁을 애타게 사랑한 그녀다)

사실 내가 머리가 큰 편은 아니고, 얼굴도 작진 않지만 표준은 되는데 양민아와 임수정 사이에 있으니 대두도 이런 대두가 없었다.

심지어 언니가 바르고 있으라던 베이스는 양민아에게 받아서 써야 하는 거였는데, 그녀는 면봉으로 한 번 덜더니 그걸로 얼굴 전체에 펴발랐다.

곁눈질로 배운 나도 비슷한 양을 발랐는데, 아니 왜 한쪽 볼 바르고 나니까 없냐.


이후로 촬영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정신없이 많이 갈아입었고, 스타일리스트가 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던 기억뿐.

찍는 동안 지켜보고 있는 예쁜 모델들을 보며 조금 주눅들었던 것도 같다.

그때 안간힘을 쓰며 생각했다. 기죽지 말자, 쫄지 말자. 이유야 어쨌든 지금 쟤들과 같은 일을 하고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런데 궁금했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생 에디터 숫자도 꽤 됐던 것 같고, 나는 키가 작고 눈에 띄는 편도 아닌데 왜 날 불렀을까.

담당기자 언니에게 물어보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 음, 너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때는 칭찬인지 아닌지, 깊게 의미를 생각해 보진 않았는데 어른이 되어 과거의 나를 보니 언니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다.

나는 늘 언니가 원하는 것의 두 배를 해야 마음이 편했다. 왜 그렇게 맹렬했느냐고?

돈도, 인맥도, 내세울 배경 없는 사람이 좁은 울타리를 벗어날 방법은 그 한가지 뿐이니까.


지금의 나도 그렇냐고? 사실 그 때만큼 맹렬하진 못한 것 같다.

오히려 좋은 조건을 타고난 사람들이 부럽고, 불공평한 세상과 내 처지의 한계로 내심 선부터 긋는다.

이런 나를 과거의 내가 본다면 한심해 하며 말할지도 모른다.

니가 할 수 있는 만큼 맹렬히 돌진해보라고.

그러면 그때의 기자언니 처럼 어디선가 누군가 그런 너를 알아볼거라고.

기회가 그렇게 온다는 걸 너는 이미 알고 있지 않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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