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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Jan 13. 2022

제가 해내면 어떡하실래요

인센티브 받아낸 골때리는 막내작가


작가 3개월 차, 내 월급은 백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아무리 2000년 초반 이어도 돈 받고 일 배우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해도 교통비, 식비, 용돈 쓰고 나면 번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수준이었다. 처음 했던 일은 프로덕션에서 진행하고 있던 mbc 민영방송에 송출되는 해외여행 프로그램의 자료조사.


인도와 네팔. 두 국가를 조사해서 작가 언니에게 드리고

(내가 전화한 선배 언니 옆에서 머리 하던 언니)

현지 코디와 연락해 섭외를 하면 언니가 촬영 구성안을 쓰고.

그걸 들고 피디가 촬영가는 구조였는데.

몇 개국을 진행하던 중 대표님이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리도 협찬받으면 좋은데.

  아니야. 해 본 소리야. 신경 쓰지 마."


참나.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시는 게 더 쓰이지.

 ㅡ 어떻게, 제가 해 볼까요?


대표님은 안 될 거야~라고 하셨다. 그런데..

지금도 믿을 수 없지만 그때 나는 이런 소릴  했다.

ㅡ 만약에요, 제가 해내면 어떡하실래요?


우리 막내가 지금 이런 소릴 하면 난 뭐라고 할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집에 가라고..?

그런데 훗날 내가 사수라고 부를, 당시 대표님은 이렇게 말하셨다.


"만약에 네가 해 내면? 인센티브를 두둑하게 주지."


대표님. 방금 저의 승부욕을 자극하셨습니다.

어디 제가 해 내 드려보지요.


그날 밤 나는 시중에 나온 모든 여행잡지와 여행사의 리스트를 만들고

다음날 제안서를 만들어 대표님께 보여드렸다.

"야... 너 진짜 하게?"


끄덕. 하는 나에게 대표님은 파이팅을 외치고 미팅을 가셨다.

빈 사무실에 혼자 남은 나는 시키지도 않은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저녁쯤 미팅을 마치고 돌아온 대표님은 종일 전화를 돌린 리스트를 보더니

기가 막히다면서 웃으셨다.

"얘 봐라, 진짜 이걸 다 했어?"


표정이 달라진 대표님은 이런 말을 남겼다.

"진짜 해볼 거면 요령을 알려줄게. 관광청에 전화해 봐."


시작한 지 세 달 된 나는 생각할 수 없는 루트였다.

고맙습니다. 하고 나서 나는  바로 존재하는 모든 관광청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너 사고 크게 쳤더라??? "


출근하자마자 들려온 말에 놀라서 쳐다보자 대표님이 껄껄 웃었다.

"생각해볼게. 인센티브 얼마 줄지."


자초지종은 이랬다.

연락을 돌린 관광청 대부분은 당연히 답이 없었는데

한 군데서 협찬 의사가 있다며 만나자고 했다는 거였다.

미팅을 다녀온 대표님은 나에게 먹고 싶은 걸 말해보라고 했다. 그러더니.


"촬영 비용을 전액 협찬해 주겠대..항공도 체제비도.

너 소개한 작가한테 고맙다고 전화했다 내가.

알려주질 않았는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


인센티브 한 마디를 듣고 무턱대고 돌린 전화의 결과

나는 그 프로그램 최초로 전액 협찬이라는 결과를 낳았고

대표님은 약속하신 대로, 당시 월급의 세 배를 인센티브로 주셨다.

 

동기 작가들 중에서 그런 인센티브를 받은 건 내가 유일했다.

내가 동기들보다 열심히 해서는 아닐 것이다.

선배 작가나 피디가 전화를 돌리라고 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고 대가를 따로 받지는 않았겠지.

내가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었던 건 분명

치기 어린 도전을 받아준 대표님 덕분이었다.

 

대표님은 그런 분이셨다.

작가는 대본에 책임져야 하니

너의 대본을 써 보라고 가르치는 선생.

한 달에 한 번 책을 선물해 주시는 선배.

인센티브를 약속하고 지키는 어른


나이가 들수록 느낀다.

무용담에 가까운 에피소드가 완성된 것은

나의 재능이 아니다. 작았지만 따뜻했던 회사에서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도록 해 주신 대표님

그 분을 소개해 주신 선배.

겁 없이 덤비는 아이에게 길을 알려주고

지켜봐 준 어른이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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