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재 Jan 14. 2022

선배작가는 하차, 피디는 잠수

험난했던 첫 예능 촬영의 기억


작가로서 지나온 시간을

글로 쓰겠다고 마음먹고 처음 한 결심은

힘들었던 이야기를 나열하지 말아야지. 였다.

오히려 버티게 해 준 분들을

잊지 않게 기록해 두어야지였는데

제목봐서 알겠지만 이번 편은 고생담이다.


사실 나는 방송작가를 시작 때

10년 정도 구성작가를 하고

이후에는 드라마를 쓰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교양이든 예능이든, 다른 사람들을 만나

간접 경험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뭘 하든 호불호가 적었달까.

그랬던 나의 첫 프로그램은 시사 교양이었고,

다음로 한  정통 다큐.

이어 능에 발을 들이게 됐다.

시작한 지 8개월 만에 세 번의 장르 변화였다.


2005-6년은 엠넷에서 모델 서바이벌이 유행하면서

신드롬처럼 모델 붐이 일어났던 해다.

내가 하게 된 프로그램 그런 거였다.

남자 모델 일곱명이, 예비모델 일곱 명을 뽑아

최종 한 명이 남는 과정을 거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남자 모델바이벌이라니.

동기들은 엄청나게 부러워했지만

그 때 는 그런 관심은 없었고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에만 설렜다.

이전까지 사무실에서 자료를 조사하거나

전화해서 정리하는 게 업무였다면

처음으로 스태프, 출연자가 모여 회의를 하고,

야외촬영하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까.


대표님은 천생 교양 피디였기에

예능 좀 해봤다는 피디님이 따로 오셨고,

작가도 새로운 언니가 오셨다.

그런데 포스터 촬영 날짜를 잡 뒤

일정이 차일피일 미뤄지기 시작했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쎄한 느낌이었다.

모델들과 회의해서 잡은 포스터 촬영 시안은

앤틱 가구들이 있는 디올 화보 느낌이었다.

그런데 피디님이 섭외했다고 보내 준 스튜디오에

전화해 보니, 아무것도 없는 빈 스튜디오라는 거다.

작가 언니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언니. 이런 콘셉트로 찍으려면..

나머지 가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작가 언니는 본인도 모른다더니.

피디와 전화를 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언니가 연락이 왔다.


"피디가 스튜디오에 올 가구 다 구해놨다고 하네.

 그리고... 너한테 미안한데 나 이거 못 할 것 같아.

 대표님한 내가 말할 거니까 이제 나한테 연락하지 마."  


다른 표현 없이, - 헐.이었다.

하나뿐인 작가선배가 촬영 이틀 전에 그만두다니...

집의 기둥이 뽑혀 날아간 것 같은 기분이랄까.

대표님은 새로 작가를 구하는 중이니 기다려 보라며

급한 건 피디님이랑 상의라고 했다. 그런데.

'전화기가 꺼져있어..'


스튜디오를 다 섭외해 놨고

가구도 다 마련해 놨다며 걱정 말라던 피디가

전화를 끄고 잠수를 타 버렸다.


대표님 진짜 전화 안 드리고 싶었는데요.

몇 시간 째 피디님 전화가 꺼져있어요.

섭외했다던 스튜디오에 전화를 해 봤는데

아무 것도 없어서 하얀 배경 찍는 것만

가능하다는데요... 가구를.. 떡해야 할까요..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대표님이 확인해보니 스튜디오 가예약도

다른 곳이 예약 확정해서 취소가 됐고,

피디가 말했던 앤틱 가구는 애초에 없었으며,

제일 중요한 포토그래퍼 조차 없 상황.

그 타이밍에 일곱 남자 모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대표 모델에게 전화가 왔다.


"디자이너 선생님이 시안에 맞춰 의상 준비 다 했대요.

 내일 촬영 어디서 해요?"


아.. 그게 저희가 아직 장소를 확정을 못 해서요.

확정되면 알려드릴 텐데, 혹시 일정이 바뀔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그가 불같이 화를 냈다.


"을 어영부영하시면 안 되죠. 사정해서 받은 디자이너 의상은

 내일 촬영하고 다른 곳에 써야 해서 다시 준비가 불가능해요.

 일곱 명 스케줄도 각자 힘들게 맞춘 거라

 만약에 내일 촬영 안 하면, 저희 다 이 프로그램 안 할 거라고 전해주세요."


와. 나 미쳐버린다 진짜......작가는 도망갔고, 피디는 잠수 탔는데

스튜디오도 없고, 포토그래퍼도, 가구도  없는데...

모델도 의상도 시간이 내일밖에 안 된다는데......무슨 수로 해결하지...?


진짜. 정말. 너무. 막막했다.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생각도 나지 않았다.

대표님과 각자 책상에 앉아서 어째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대표님이 갑자기 아, 하시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거셨다.

"진짜 미안하다. 내일 딱 하루만 도와줘."


통화를 끊은 대표님이 말했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는데 은 문제를 하나 해결했어, 포토그래퍼는 구했다."



스케줄이 되는 포토 스튜디오도 거의 없었지만,

어떻게 저렴한 한 곳을 구했다.

근데 그게 답은 아니었다.

빌린다고 한들 빈 공간인데 가구는 어디서 구할 거냐고.

저 콘셉트로 똑같이 안 찍으면 집에 간다고

모델들은 으름장을 놓고있는데 무슨 수로 해결하냐고...

온갖 장소에 전화를 다 해보다 밤 11시가 됐다.

다음 날 촬영 소집 시간은 8시.

그래. 인정하자. 망했다....


다시 모델 대표에게 전화가 왔다. 받을 수가 없다..

대표님은 이렇게 말했다.

더 늦기 전에 촬영 안 될 것 같다고 말할까.

너한테 하라고 안 해, 내가 할게.


그때의 나에게 다시 묻고 싶다.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했냐고.

나는 대표님에게, 30분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혼자 사무실에 남아서 고민을 하다가

앤티크 가구를 검색창에 쳤다.

어떻게 가구를 구고싶다는 무의식에서 나온 거였는데.

 

일산이었나 분당이었나. 앤티크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조악한 사진 두 장뿐이었지만 느낌이 화보와 얼추 비슷해 보였다.

다르다고 해도 딱히 대안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 20분. 받을 리 없지만..

031로 시작하는 번호로 전활 걸었다.

여보세요..


... 받았다.

핸드폰으로 연결되어 전화를 받은 사람은 카페 사장이라고 했다.


ㅡ 늦은 시간에 전화드려서 너무 죄송한데요.

앤틱 가구가 너무 예쁜데 저희가 이런 곳에서

내일 아침 8시에 꼭 촬영을 해야 하거든요..

너무 급해서 실례지만 연락을 드렸어요.

솔직히 말하면 섭외할 돈도 넉넉지는 않은데요.

정말 너무 죄송한데요. 사장님,

.... 그냥 저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너무너무 죄송합니다..


통사정을 하던 나는 그만  처음 전화하는 사람 앞에서 울어버렸다.


다행히도 카페 사장님은 좋은 분이셨다.

앤틱 가구가 비싸니 의만 잘해 달라고 하시며

원하는 상황에 맞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엉엉 울면서 연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하고

시간을 보니 밤 11시 40분이 좀 넘은 시간. 대표님에게 전화를 했다.

 

ㅡ 앤티크 카페를 섭외했어요.

내일 아침 촬영 가능하대요. 모델들에게도 여기로 오라고 할게요.


취소해도 되는 촬영을 굳이 유지했다.

내 생에 첫 야외촬영을 이대로 망칠 수 없다는 발악이었지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인터넷에 있는 사진은 달랑 두 장.

가구들이 있다지만 태도 모르고, 내부 구조도 가늠할 수 없다.

뜬눈으로 밤을 새고 집에서 나오면서 온갖 걱정을 다 했다.

만약에 내가 본 가구는 다 없고 이상한 것만 있으면??

일곱 명이 설 수 없을 만큼 좁으면??

모델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화내면 어떡하지..


아침이 왔다. 밤새 울고불고한 탓에 눈은 퉁퉁 부어있고

모자를 주워 썼어도 추레한 몰골은 감출 길이 없었다.

제발 찍을 수 있는 상태이게만 해 주세요..

가슴을 졸이며 섭외한 카페에 도착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너무 나서 화장실로 뛰어가 한참을 엉엉 울었다.


모델들이 구해온 시안 속 가구들이

어느 것 하나 움직이지 않아도 될 만큼

배치하고 싶은 모양으로 예쁘게 놓여 있었다.

커튼, 소파, 서랍장까지 똑같은 구도로.

마치 간밤에 누가 먼저 와서 만들어 둔 것처럼.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걸까?


포스터 촬영은 너무나 순조롭게 진행됐다.

어떻게 사진과 똑같은 데를 구했냐며

모델들과 디자이너는 감동이라고 했다.

대표님이 슬쩍 다가와서는 원래 아는 데였지? 하고 싱긋 웃었다.


꿈인지 생신지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범벅이 된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위 ) 레퍼런스 시안 /  아래 ) 포스터 촬영 완본

방송 촬영을 하다보면 극도의 절망의 순간이 올 때가 있고.

반대로 극도의 기적이 일어는 순간도 있다.

그 날 나는 그게 하루에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안 되는 일도 못 할 일도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작가 6개월 차에 선배 작가는 도망가고 피디는 잠수 탄 채로

밤 열두시에 다음 날 아침 촬영장소를 찾고 어떻게든 해 냈다면

지금의 나는 그 무엇이 쏟아지든 어떻게든, 해낼 수 있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제가 해내면 어떡하실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