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농사망친 땅도 시간이 흐르면 순이 돋듯
도망간 작가언니 자리에도 새 언니가 왔다.
내가 만난 첫 예능작가였던 L언니는
유쾌하고, 예쁘고, 일도 시원하게 하는 멋진 분이었다.
시련은 오히려 잘 된 일 같았다.
전에 있던 언니는 교양작가라서,
예능이 부담스럽다고 도망간거였으니까.
단 하나 문제점이 있다면, 언니가 당시 다른 프로그램을 동시에 하고 계셨기 때문에
촬영에 거의 오실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뭐. 대본도 써 주시고 내 일도 봐주시는 걸.
나는 그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평창에 있는 펜션에서 2박 3일 촬영을 앞둔 날이었다.
대본을 보낸 언니는 급히 다른 일정이 생겨서 못 올 것 같다며, 미안하다는 연락을 해 오셨다.
아무리 깡좋은 나라지만 떨리기 시작했다.
2박 3일 합숙 촬영을 떠나야 하는 멤버는
당시 인기 많은 남자모델 7 명에 최종 선발된 예비 남자모델 7명까지 14명.
피디. 카메라팀. 조명팀. 음향팀. 등등 스태프 수십명.
다음 날 서울에서 미션 촬영을 위해서 올 여자모델 두 명과 성형외과 의사.
포토그래퍼 팀까지 대략 6-70명 규모의 촬영이었다.
그런데 작가는 경력이 1년도 안 된 나 혼자라니.
연출할 대표님이 챙기신다해도...너무 무서운 일이었다.
노을이 한 껏 묻은 가을의 평창은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언니가 구성안을 주며 당부한 대로 촬영하려면 초긴장 상태로 있을 수 밖에.
2박 3일의 촬영 중 강력하게 기억나는 두 개의 장면은
두 번째 날 아침, 늦잠 잔 남자모델들 숙소에 들어가서
촬영해야 된다며 일일이 깨우고 다녔던 기억과,문제의 두 번째 날 밤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뒷풀이 격으로 맥주를 한 잔씩 하게 됐는데
갑자기 내 나이가 화두가 됐다.
"얼굴이 너무 어려, 애기야. 학교는 졸업했어??"
그 때까지 나는 경력과 나이를 숨긴 채 "작가님" 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봐. 나보다 어리지, 너?"
일반인 출연자 한 명이 술에 취했는지 갑자기 말을 놓았다.
아. 여기서 나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1번. 네 오빠 - 사실 저는 스물 다섯입니당, 하고 분위기를 풀어 준다.
2번. 아닌데 너보다 누난데? 하고 거짓말 한다.
3번. 취하셨나보다. 하하하 하고 넘긴다.
4번. 이게 정신이 나갔나, 하고 싸운다.
정상적이라면 몇 번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이 많진 않은데요. 촬영으로 나오셨으면 존댓말은 합시다.
아니면 나도 너한테 반말하고. 그럴까? "
결국 와. 보통아니네. 하고 지나갔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냥 오빠라고 하고 친해질 걸 싶기도 하다.
과거의 나는 왜 그리 뻣뻣했을까싶지만.
그저 어린 나로 각인되면 스태프로는 통제할 수 없다고 믿었다.
예비모델이 한 명씩 탈락하고 마지막 1위를 뽑으며 프로그램은 끝이났다.
마지막 촬영 날, 나는 출연자 모두와
하나뿐이었던 선배언니에게 밤새 손 편지를 썼다.
아쉬운 마음에 편지를 쓰다 울기도 했던 것 같다.
첫 예능 프로그램의 기억. 그건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방송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사람들과 정이든 프로그램이자.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의 관계를 고민하게 만든 프로그램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