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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Jan 15. 2022

둘 중에 골라, 나야 그 언니야.

작가 선배 A와 H 사이에 끼인 막내작가의 선택


모델 서바이벌이 끝나고 몇 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얼굴을  본 A 작가 언니에게 연락이 다.

요새 뭐해?새로 들어가는 케이블 프로그램 하나 있는데 할래?

그 프로 메인작가 언니는 공중파도 많이 하는 언니야.

알아두면 좋을 거니까 만나 봐.


공중파와 케이블. 지금은 잘 안 쓰는 말이지만

2006-7년 방송계는 종편채널이 출범하기 전이었고,

공중파 3사와 케이블 채널 몇 개만 있던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공중파 출신은 성골,

케이블은 제대로 된 일이 아니라는 인식에

은근히 무시하는 시선이 팽배하던 시기였다.

공중파 언니들은 케이블 출신 작가들을 잘 쓰지 않았고

그 유리천장은 선택받지 못한 이들에겐 두꺼운 벽이었다.


케이블 프로그램만 하고 있던

공중파 프로그램 메인 언니와 연결된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 다름없었던 것이다.


전화가 왔다.

H언니 공중파 심야 음악프로그램 메인작가며 자신을 소개했다.

면접을 보러 간 곳은 마포에 있는 H언니 작업실.

벨을 누르자 문을 열고 나온 H언니의 인상은 강렬했다.

반삭에 가까운 짧은 쇼트커트 헤어와 하얀색 상의

화장기 없고 마른 H언니를 더 창백하게 만들었는데

뒤로는 은은하게 담배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간의 패기는 어디 가고 바짝 얼어붙은 나

언니는 재떨이에 잔불을 비벼 끄며 말했다.


"반갑다. 얘기 듣고 금했어.

 네가 싸가진 좀 없지만 일을 그렇게 잘한다며?"


식은땀이 주르륵 났다.

"놀랬어? 농담이야. 일 싹싹하게 알아서 잘하고

 할 말도 다 하는. 보통 아닌 막내라고 하더라."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평판이었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나에게 언니는

만나보니 어떤지 알겠다며, 같이 일해보고 싶다고 했다.

공식적인 첫 번째 이직이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언니 작업실로 출근했다.

새하얀 책상과 책장들. 산뜻한 분위기는

그때까지 일했던 프로덕션과는 사뭇 달랐고.

나와 메인 언니 사이에 줄줄이 선배들이 생긴 것도

나로서는 처음 겪는, 적응해야 하는 일이었다.

언니들이 돌아가며 부탁하는 자료들을 정리해내면

'케이블 한 거치곤 곧 잘하네'라는 말이 돌아왔다.


며칠이 지났다.

언니들과 차츰 까워져 얼었던 어깨가 쯤 녹았지만

합류하겠다던 A언니가 출근하지 않는 건 맘에 걸렸다.

던 중에 A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너 거기 출근하고 있니?

내일부터 가지 마. 거기 나 안 하기로 했어.

아무튼 가지 말고 기다려봐. 락할게.

일단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H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A가 우리 프로그램을 같이 하지 않기로 했어.

너는 A가 소개했으니 마음은 불편하겠지만

나는 너랑 같이 일 하고 싶어.

이거 끝나면 공중파 막내로 데리고 갈게.

너한테 손해는 아닐 거야. 나랑 같이 하자.


아... 왜 이런 시련이 오는 걸까.

심장이 귀에서 뛰는 것 같았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생각해 볼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A언니 전화가 걸려왔다.

언닌 같이 갈 프로그램이 있다고 이야기를 했다.

제안한 프로그램은 케이블 채널에서 하는 것으로

술 취한 사람을 길에서 잡아 인터뷰하고 랠시킨 뒤

술 깨면 안전하게 돌려보내는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머리가 복잡해진 나는 A 언니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생각 볼 시간을 달라고.


언니는 무슨 생각을 또 하냐며 웃었고

쉽게 하고 다른 걸 또 하면 되니 금방 답을 달라고 했다.


사실 쉬운 일인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쉽지 않았다.

의리를 생각하면 H언니의 제안을 거절하고

처음 만나서 날 데리고 간 A 언니를 따라가는 게 옳았다.

하지만 일을 생각하면 공중파 음악프로 자리는 귀한 거고

A언니가 하자는  마음이 불편해 자신이 없었다.


나는 밤새 고민했고, 어렵게 결론을 냈다.

먼저 모델 프로그램을 같이했던 A언니에게 전활 했다.

감사하지만 저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제안하신 프로그램을 즐겁게 할 자신이 없습니다.


언니는 발대발 화를 냈다.

이 프로그램이 어디가 부끄럽다는 거냐며

며칠 봤다고 H언니에게 가겠다는 거냐며

나는 그 H언니에게 갈 것이 아니라고도 했지만

A언니는 서운하다며 전화를 끊었다.

서운함도 이해됐고 나도 속상했지만 달리 방법은 없었다.


남은 건 H언니. 숨을 고르고 전화를 했다.

같이 일하자는 제안도. 공중파 자리도 감사요.

근데 소개해 준 A언니에게 미안해서

남을 수가 없습니다.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H언니도 A언니와 비슷한 말을 했다.

의리 좋은데, 막내는 좋은 제안 오면 하는 게 맞아.

너 어떻게 할 생각이니.  아는 데가 있어?

나는 아무것도 없지만 혼자 해보겠다고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하다고 마무릴 하고 전화를 끊었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는 문제에서 답을 내지 않은 나는 옳은 선택을 한 걸까.

텅 빈 놀이터에 앉아 생각했다. 나는 원점으로 돌아왔구나.

잘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졸업 전에 취직했던 나는 그때 처음 취준생이 되었다.

동기들에게 일자리를 수소문하고 인터넷 구인을 찾는 백수로 지내길 몇 개월.

막막했고, 두려웠고. 후회했던 적도 있었다.

도덕관념은 무슨. A언니 따라가서 프로그램했으면

돈도 벌고 언니 라인이나 쉽게 됐을 텐데,

의리는 개뿔. H언니 작업실에 남았더라면

하자던 일 끝내고 공중파도 쉽게 갔을 텐데.

하지만 자리에 누워 백 번 고민을 해도 답은 같았다.


그때 생각했다. 앞으로 내가 이런 마음으로 일을 한다면

쉽지는 않을 것 같다고.

지금의 내가 그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마 같은 답을 낼 것이다.

방송으로 돈버는 일도, 큰 프로그램의 작가라는 명예도

도덕과 윤리 관념도, 사람 간의 의리도 소중하지만

생각을 글을 쓰며 살겠다고 결심한 이상.

적어도 소신있는 작가는 되고 싶으니까.


그래서 매 순간. 쉬운 길 못 가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사람인 걸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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