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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Jan 15. 2022

땜빵하러 왔습니다만

 어디서 굴러온 4주 시한부 작가


둘이 싸우고, 서로 자기와 함께 일하자는

두 언니의 제안을 호기롭게 마다하고 나온 것을

나는 스스로 멋진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생각보다 일자리 구하긴 쉽지 않았고

노는 날이 길어지자 결국

진짜 작가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 하게 됐다.

방송작가 시작한 지 1년 반, 처음 찾아온 위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둘 중 하나인 H 언니의 전화가 걸려왔다.

"일자리 구했니? 아님 땜빵이라도 할래?"

마지막 4회가 남은 케이블 프로그램에서

작가 충원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가겠다고 했다. 그만 둘 때 그만두더라도,

4주치는 벌고 그만두지 뭐.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나.

언제나 그랬듯, 시작은 갑작스러웠지만

나는 제안받은 다음 날. 출근을 시작했다.

그때는 몰랐다. 4주 땜빵을 하러 간 그곳에서

일생 일대의 버라이어티 한 일들이 불꽃놀이처럼 터질 거라는 걸.


호랭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겠다.

CJ E&M 이 없던 2006-7년 쯤

당시 케이블에서 이름을 알 만한 몇 군데는

음악 채널 'M-NET'과 패션 채널 '동아 TV'

그리고 나름 케이블계의 거대기업.

제과 업체 오리온에서 만든 '온미디어'의 여러 채널이 있었다.

'온스타일' , '온게임넷' , '슈퍼액션' , 'Xtm' 이 모인

분당 서현역에 있던 온미디어 본사.

그 곳에서 내가 할 프로그램은 연애 리얼리티였다.

남자와 여자가 수갑을 차고 24시간 데이트를 해 본 뒤

커플로 선택할까 말까를 결정하는 파격적인 콘셉트.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케이블의 숙원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볼까'였는데

해외에서 유행하는 '도전 슈퍼모델' 같은 트렌디함이거나

'치터스' 류의 바람둥이 덮치기 같은 독한 프로그램도 많았다.

그래도 내가 했던 프로그램은 남녀가 나오는 연애 예능 치고는

예쁘고 풋풋한 데이트를 즐기는 나름 순한 맛이었다.

첫 촬영장은 일산에 있는 장미공원이었다.

깊은 밤, 화려한 조명이 켜진 가운데 진행된

(그때까진 처음 본) 큰 규모의 촬영에 나는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땜빵이어도, 4개뿐이어도 좋았다,

그만두지 않을 방법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간절함은 솟아날 구멍을 만들기도 하는지.

마지막 4회분에 시청률이 급상승하면서 내부에서 연장이 결정되었다.

메인 언니는 복덩이가 굴러들어 왔다고 했고 나도 기뻤지만..

그때부터 생긴 의외의 문제는 동료 작가의 시샘이었다.


한 번은 직속 선배인 J가 나를 불렀다.

전문대를 나와 나보다 일을 일찍 시작한

동갑이지만 연차가 높은 선배였는데.

교회에서 가는 봉사활동이 있는데

메인언니에게 거짓말하고 갈 테니 입단속하라는 거였다.

교회에서 가는 봉사활동을 왜 거짓말하는지는 모르지만

알겠다고 했는데, 문제는 그 후였다.

어떻게 알게 됐는지 메인 언니가 눈치를 챘는데

그걸 일렀다고 생각하는지 대놓고 미워하기 시작한 거다.

당시로선 그럴 것이 메인 언니가 자릴 비울 때마다

언니가 너 예뻐하잖아. 저 언니가 다른 데 가자면 갈 거야?

언니가 너한테 따로 무슨 말 안 해? 하고

수시로 확인하던 때였으니, 심증은 이해한다만 억울하긴 했다.

그래도 참고 열심히 일하면 지나가겠지, 하고 있었는데

메인 언니가 독대를 요청했다.

"네가 일을 게을리해서, J가 힘들다는데 무슨 일이야?"


그녀가 나에게 뭘 시켰는데 내가 안 했단다.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상황을 보니 메인 언니가 J 선배에게 시킨 일을

J선배가 까먹은 것 같은데

그걸 '나한테 시켰더니 안 했다'로 덮어 씌운거였다.

'나이도 같은 후배가 번번이 그래서 힘들다'까지 얹어서.


나에게는 철칙이 있다.

잘못한 건 쉽게 인정한다. 책임지라면 그것도 한다.

그런데.  부당하게 덮어 씌우는 건 참지 않는다.

가뜩이나 워라밸 없이 일을 시키던 선배들이었다.

주말이고 주중이고 낮이고 밤이고 자료를 원했고

밖에서 다른 일을 보다 전화라도 놓치면

그런 식으로 하면 잘라버린다는 말을 하기 십상.

미움받은 뒤로 일로 만회해보려고

선배가 집에 가버려도 회사에 남아 일했고

주말 외출할 때도 연락이 올까봐

노트북을 들고 나가 자료를 넘겼는데

내가. 번번이. 일을 안 하고 놀았다고...?


느낌으로 알겠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노빠꾸 직진인 나는

메인 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싸가지 없다고 하면 인정할게요, 그런데 일 안 했다는 건.

 매일 한 일 적어놨으니 삼자대면 하셔도 돼요.

 전 그 말 인정 못해요, 언니. "


그 순간이었다.

땜빵하러 굴러들어와 연장된 프로그램에서

또라이 막내의 탄생을 알리며

내 인생이 극도로 꼬이기 시작한 순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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