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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Jan 16. 2022

끝없는 오해를 푸는 방법

지독한 이간질에서 살아남은 노하우

 

처음 내가 작가를 시작했던 곳은

대표님을 포함해 3명뿐인 작은 사무실이었다.

유독 의견을 많이 묻고, 자립감을 주면서

매 순간 직접 소통했던 사수가 있고

메인 언니가 거의 오지 않았고

혼자 알아서 하는 일에 익숙했다.

그러나 땜빵하러 갔던 곳은 달랐다.


작가는 나를 포함해 7명으로,

막내작가 3명이 서브작가 세명을 돕고

맨 위에 메인작가 언니가 있는 상황이었다.

막내작가로 충원된 나는 나이는 동갑이지만 연차가 2년 높은 선배의 일을 서포트하게 되었다.

층층시야도 낯설었지만 더 큰 문제는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관계에 유리벽이 생긴 거였다

막내작가들은 모두 선배를 친근히 언니라고 불렀는데,

내가 부르는 호칭이 언니가 아닌 게 문제였다.

동갑인데 언니로 부르는게 이상해 선배라고 했는데

별 것 아닌 문제가 어색한 상황을 만들었다.

다른 작가들은 사적인 친분이 있었기에

일만 잘 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나와

심리적 거리가 같을 순 없었다.

 

mbti 로 말하자면 나는 지독한 T 유형으로

직장에선 사적으로 가깝게 지내려 노력하지 않아도

 잘하면 그만이라고 믿는 편이다.

어쨌든 일을 하기 위해 만났으니

빈틈없이 해내려고는 노력하던 중이었는데.

선배가 메인언니한테 거짓말한 게 들통나고

그걸 내가 말했다고 착각한 이후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나를 뭐로 본 거지?아니 대놓고 확인이라도 하던지.

솔직히 그런 우스운 핑계로 거짓말까지 해가며

이간질한 선배에게 따지고도 싶었다.

제가 일을 안 해서 힘드시다뇨?

시킨 적도 없는일을 무슨 수로 하죠?

그 날 일 다 적어놓은 다이어리 보여드려요?


그래도 쪼렙이 따질 수는 없지....

그런 나에게 메인 언니는 말했다.


니 잘못 아닌 거 알 거 같다.

그런데 J랑 같이는 일 못 시킬 것 같으니

다음 주부터 다른 코너 해라.


그렇게 나는 프로그램 내에서

작은 코너로 옮기게 되었다.


내가 하던 프로그램에는 두 개의 코너가 있었다.

남녀가 24시간 데이트를 한 뒤 서롤 선택하는  

40-45분 정도의 분량의 메인 아이템과

연인 간의 깜짝카메라 같은 코너로

15-20분 정도의 분량인, 서브 아이템.

약간 강등 느낌이어서 처참한

다음 날  코너를 담당하던 M언니가

날 앉혀놓고 이렇게 말을 했다.


2주 같이 일해보고 다시 얘기 하재서 받은 거야.

나는 그냥, 너 하는거 보고 결정할게.


진짜 웃기네. 고민했다. 이런 취급을 받고 일해야 하나..

그만두고 싶었지만 딱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추천해서 보냈던 H언니

얼굴에 먹칠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그만두면 진짜 문제 일으킨 사람이 되는데

그만두더라도 명예는 회복해야지.

나는 무조건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오해가 있고,  스스로 풀어보겠다고.


새롭게 맡은 코너는 일반인 깜짝카메라였는데

내가 하기 전엔 간단한 실험 같은 내용이었다.

소개팅에서 남자는 평범한 여자와 예쁜 여자를 볼 때

어떻게 다른가? 같은. 그런데 내가 들어가면서 왜인지

버라이어티 한 상황으로 바뀌었다.

예시를 들어 보겠다.


카페에서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에게

사실 나 간첩이었어,라고 고백한다.

놀라는 남자 친구. 믿지 않지만

그때 등장하는 국정원 요원들과 총격전!

여친은 갑자기 총을 꺼내 남자 친구를 보호하며 액션을 한다.

그런 여자 친구를 본 남자 친구의 반응은??


방송이 나가고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다음 주부터 분량이 늘어나더니

몇 주 뒤, 서브 아이템과 메인 아이템의 위치가 바뀌었다.

메인 언니는 웃었다. 네가 희한한 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땜빵하러 오고 끝나던 프로그램이 연장됐고

서브 코너 보냈더니 시청률이 올라가

순서 바뀌는 게 우연은 아닐 거라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제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냥 조용히 일하게 해 주세요.  


2주가 지난 후, 서브 언니는 나와 같이 계속 일하겠다고

메인 언니에게 이야기했다고 했다.

깜짝카메라 코너는 시청률이 점점 올라갔고

기대가 커져 고생의 강도도 높아졌다.  


사실 이 프로그램은 내 작가 생활에서

극도의 고생 프로젝트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따로 글을 써도 모자랄 정도로

맵고 짠 시트콤 같은 상황이 시시각각 찾아왔다.

미션 임파서블 같은 일을 해내는 동안 몇 달이 흘렀다.

그리고 초겨울 무렵.

마지막 녹화를 마치고, 쫑파티를 하던 날.

조용히 구석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잘 버텼다. 나 자신. 4주 땜빵하러 굴러와서 살아남고

미움 받아 힘든 걸 참아냈고

이간질에 잘릴 뻔하다 좌천됐는데

오해는 풀렸는지 모르겠지만

뭐 그래, 끝까지 남았으니 그걸로 됐다.

 

그러고 있는데, 깜짝카메라 코너를 했던 언니가

한 잔 같이 하자며 찾아왔다.

술잔을 짠 하고 부딪히는데

언니가 갑자기 눈물을 팍 하고 터뜨렸다.


미안해. 내가 너무 오해했어. 그래서 너 초반에 일부러 고생시켰어.  

불평없이 해서 미안하더라..

그동안 말 못했지만, 진짜 너무 수고했어. 미안해.


말하는 내내 미안하다고. 꺽꺽 우는 언니를 보면서

나는 간신히 눈물을 참았다.

거기서 울어버리면 그동안 버텨온 시간이

사람들 앞에서 한 번에 터져버릴 것 만 같아서.

그 시간에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아서.


이간질에서, 오해에서 버티는 나의 방법은 단 하나다.

도망치는 게 도움이 된다는 말도 있지만

그 도망은 결국 누구에게든 꼬리표로 남는다.

내가 문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건 반드시.

직접 증명해 내야 한다.


누가 뭐라해도 자신의 명예는

스스로 지켜내야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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