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읗 Dec 08. 2020

아버지는 왜 한 번도 치킨을 사 오지 않으셨을까?

퇴사는 했지만 여전히 글은 씁니다

재미있게 본 드라마 “스타트 업”에서 주인공 서달미의 아버지는, 퇴근 후 집에 돌아올 때면 항상 치킨을 사 들고 왔다. 치킨을 든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런 마음을 치킨을 사 들고 가는 것으로 표현했다. 치킨을 본 아이들은 먹을 생각에 설레었고, 그런 아이들을 본 아버지는 흐뭇할 것이다.


내 아버지 영수는 33년간 단 한 번도 치킨을 사 들고 오지 않으셨다. 내 기억이 맞는지 모르지만, 퇴근 후 들어온 아버지는 늘 빈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생일, 결혼기념일, 크리스마스 등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선물하거나 마음을 전하는 일에 항상 서툴렀다. 그래서 나도 그렇고 엄마 정옥이도 영수에게 한 번도 살가운 말이나 선물 같은 걸 받아 본 적 없다. “경상도 남자라서 표현할 줄 모르는 거다.”라고 넘겨 버리기엔 모든 경상도 남자들이 선물할 줄 모르고 표현할 줄 모른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생이나 나는 서로의 생일을 항상 챙겼고, 부모님 생신도 챙겼다. 그렇지만 나도 아버지 영수처럼 마음을 전하는 것에 꽤 서툴다. 이번 생일에 엄마가 보내준 미역국을 먹으며 “부산에 내려갈 때 선물이라도 사 가야지.”하고 생각만 했다. 정작 선물은 사 들고 가지 못했다. 하지만 늘 그랬던 건 아니다. 엄마 생신이나 어버이날이면 편지와 선물을 드렸다. 하지만 아무 날도 아닐 때는 뭔가 선물을 전하기 어려웠다. 생일날이면 생일이니까 혹은 어버이날이면 누구나 다 선물을 하니까 내 마음을 감출 수 있었지만 아무 날도 아닐 땐 왠지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낯부끄럽고, 낯간지러워서 그런 것 같다.


아버지 영수가 우릴 사랑하지 않고 챙겨주고 싶지 않아서 치킨을 사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치킨을 싫어해서도 아니고, 살 줄 몰라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럼 이유는 뭘까? 귀찮아서? 아니면 살찔까 봐..? 잘 모르지만 아마 아버지도 그랬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아버지도 치킨을 사 들고 오지 않았을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더 모르겠다. 그냥 정 궁금하면 다음에 아버지께 한 번 물어봐야겠다. 왜 한 번도 치킨을 사 들고 오지 않으셨냐고 말이다. 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치킨 먹는 장면을 못 찾겠다 ㅜ 그래도 넘 잼있었던 스타트 업


다시 추워진 겨울이다. 겨울 하면 떠오르는 건 따뜻한 오뎅 국물, 돌돌만 목도리, 새하얀 눈도 있겠지만 나에겐 팥이 잔뜩 든 붕어빵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붕어빵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엄마 정옥이가 떠오른다.

정옥이는 팥을 참 좋아했다. 그래서 팥빵이나 팥죽도 좋아했다. 추운 겨울에 붕어빵을 보면 엄마 생각이 난다. 그런데 엄마 정옥이가 그랬다.


“엄마가 니 어릴 때 붕어빵 사 오라고 시킨 적 있다이가. 그거 왜 그랬는지 아나. 니가 너거 아빠를 진짜 많이 닮았거든. 그래서 니도 너거 아빠 맨키로 뭘 사 올 줄 몰라. 너거 아빠도 생전에 뭐 꽈자나 치킨 같은 거 한~번도 사 온 적 없다 아이가. 근데 니도 좀 클타. 그래서 내가 느그 아빠처럼 안 키울라고 니한테 붕어빵 사 오라고 안 캤나. 그랬드만 그다음부턴 쪼매 사 오데. 내가 니 느그 아빠 맨키로 안 키울라고 얼매나 그랬는지 아나.”


그랬다. 옥이는 팥도 좋아했고, 붕어빵도 좋아했지만 그전에 더 좋아한 건 바로 나였다. 옥이의 사명은 나를 영수처럼 키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뭔가 조금 씁쓸하긴 하지만 옥이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먹고싶다...


사람이란 누구나 타고난 것이 있다. 성격이나 성향은 애초에 타고 난 부분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 기본적으로 내성적인 성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하고 바꿔도 베이스는 내성적이다. 키가 160cm인 사람에게 노력해서 180cm으로 만들라고 한다면 가능한 이야기일까? 물론 자세교정을 하고, 물리치료를 받으면 1~2cm는 클 수 있다. 어디까지나 노력으로 가능한 건 거기까지. 그 이상은 바뀌지 않는다. 타고난 건 모두 그렇다.


나도 타고난 베이스는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다. 그래서 어릴 때 친구들이 놀자고 했을 때도 엄마가 나가 놀지 말라고 했다고 있지도 않은 거짓말로 엄마 핑계를 댔다며 옥이가 말해줬다. 지금도 명확히 기억나는 건 7살 유치원 때 일이다. 유치원에서 캠프를 간 적이 있었다. 당시 무슨 인디언 복장을 했었다. 공연을 했는진 기억나지 않지만, 머리에 두르는 머리띠를 만들었던 기억은 확실히 난다. 만들 땐 몰랐다. 하지만 다 만들고 다른 친구들이 만든 머리띠를 보고 알았다. 내가 만든 머리띠의 풀잎이 상대적으로 너무 작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후회했다.

상대적으로 작은 내 풀잎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풀잎만큼 나도 작아진 느낌이었다. 나는 왜 다른 친구들처럼 크게 만들지 못했을까를 생각하며 실망했다. 지금도 집에 가면 그때 그 머리띠를 하고 찍은 사진이 있다.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내 눈에 보이는 건 작디작은 머리에 두른 조그마하고 보잘것없는 풀잎만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온전히 나라는 사람을 상징적으로 대변해 주는 듯했다.


어릴 적 엄마가 김치를 먹으라고 주면 꼭 잘게 잘게 찢어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그런 나에게 머스마 새끼가 뭘 그리 쪼개냐며 좀 큼지막하게 먹으라고 했지만 어리고 작은 난 큰 게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서른이 넘어 다 크고 나서도 그런 성향은 좀처럼 바뀌지 않더라. 방금도 김치에 밥을 먹으면서 김치를 가위로 잘근잘근 잘라서 먹는 걸 보곤 좀 웃겼다.


엄마 옥이는 나의 소심하고 소극적인 성격을 고치려고 부단히 애썼다. 남자라면 배포도 있어야 하고, 그릇도 커야 하고 김치도 큼지막하게 먹어야 한다는 게 옥이의 지론이었다. 그에 비해 내가 가진 그릇은 잘게 쪼갠 김치만큼 작았다. 그런 내가 고등학교 학생회장 선거에 나섰다. 이유는 엄마 때문이었다. 정말 하기 싫었지만, 고등학교도 인문계를 가지 못하고 실업계를 와서 미안했는데 이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나를 위해 학생회장을 시켰지만 정작 난 엄마 옥이를 위해 학생회장 선거에 나섰다. 결과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당선되었고, 그 후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조금 그릇이 커졌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를 생각하면 과거의 내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그만큼 많이 변했고, 많이 성장했지만, 기본적인 나를 이루고 있는 성향과 베이스는 바뀌지 않았다. 이런 나를 보면 아버지 영수도 그렇지 않을까. 아마 영수는 나보다 자란 환경이 열악했을 것이다. 늘 먹고사는 게 일 순위였던 가난한 그때는 사람의 성향이 어떻고, 성격이 어떤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테니깐 말이다. 아마 어린 영수에게 어린 나처럼 옆에 정옥이 같은 엄마가 있었다면 지금쯤 치킨을 사 올 수 있지 않았을까? 아마도 영수의 엄마이자 나의 할머니는 매일 밭에 나가느라 그런 어린 영수를 돌볼 여력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다 자란 나이기도 하고 치킨을 살 수 있는 어른이 되었으니 어릴 적 받지 못했던 영수에게 내가 먼저 치킨을 사줘야겠다. 다음에 부산을 간다면 집에 들어갈 때 치킨을 두 마리 사 들고 가야겠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양념이 가득 배어 있는 양념 통닭으로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전교 1등 하던 친구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