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글쓰기
29살에 난 35살 현재의 나를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1년 6개월 동안 세계여행을 다녀온 후였다. 당시 난 패기로 가득 찼으며 오랜 여행으로 얻은 경험과 용기 그리고 도전정신으로 뭐든 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여행 뽕을 맞은 것이다. 당시엔 나 말고도 세계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게 일종의 붐이 됐던 것이다.
대학생일 때 학교에 특강을 하러 오신 교수님이 계셨다. 그분의 강의를 듣고 좋아서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분을 쌓게 되었다. 그분은 나의 여행을 응원해 주셨고, 나의 행보에 항상 지지해 주셨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온 나에게 대뜸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구나."
"네가 세운 계획에 혹시 플랜 B는 있니?"
"여행을 다녀왔으면 책을 한 권 쓰면 좋겠구나. 그래야 어디서 강연을 해도 몸 값을 많이 받을 수 있단다."
이런 조언을 아낌없이 해주셨다. 하지만 난 플랜 B도 없었고, 책을 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워낙 남들이 하는 걸 따라 하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남들처럼 똑같이 여행 다녀와서 책으로 내는 게 싫었다. 그것도 하나의 정형화된 틀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시엔 그랬다. 세계여행 다녀오고 책을 낸 다음 강연하며 돈 벌고 하는 게 이 쪽 세계에선 일반적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엔 그들이 멋있어 보였지만 다녀온 후엔 그게 그렇게 멋지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들도 다른 방도가 없으니 남들 하는 걸 따라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행 책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난 이걸 후회하진 않는다. 그 후에 여행 책을 써보려고 몇 번을 시도했지만, 내 문체와 방식으로는 전혀 느낌이 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해 책으로 만들지 못했다.
나만의 방법으로 내 삶을 이어가 보고 싶었다. 그렇게 은행 경비원을 시작하게 되었고, 작은 문화행사를 기획하게 되었으며, 다니던 은행을 퇴사한 후 호기롭게 문화기획을 사업으로 만들고자 도전했지만 결국 포기하게 되었다.
포기한 후 여행 책을 만들어 보자고 도전했지만, 도전조차 해 보지 못하고 다시 포기하게 되었다. 결국 먹고살기 위해 다시 은행 경비원이 된 것이다.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 나이 31살이었다. 그리고 33살까지 은행 경비원을 살았다.
그 후엔 딱히 도전 같은 건 없었다. 내 처지와 능력을 뼈저리게 느낀 후 그저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 주말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인생은 앞으로도 이렇게 흘러갈 줄 알았다. 물론 당시에도 열심히 책 읽고 글은 썼지만, 방구석에서 혼자 읽고 썼을 뿐, 글이 책이 되고 작가가 되리라고는 상상이나 생각은 했지만 진짜 되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은행을 다니면서 은행원들은 나에게 앞으로 뭘 할 건지 가끔 물었다. 그때마다 책을 쓰는 작가가 될 거다는 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진짜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렇게 코로나가 시작된 2020년이 왔고, 잘 다니던 은행에서 쫓겨나게 됐다. 사실 이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인생은 정말 내 마음처럼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당시 깨닫게 됐다.
이제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뭘 할 수 있나? 내가? 절망뿐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품고 있었던 작가 그리고 글쓰기라는 것을 한 번 제대로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쉽지 않았다. 투고한 출판사마다 거절을 당했으니 이젠 더 이상에 희망은 나에게 없었다.
모든 출판사가 거절을 했지만, 어떤 곳은 내 글에 피드백을 줬다. 그 피드백이 사실 나에겐 굉장히 큰 자양분이 되었다. 더 공부하게 만들었고, 더 완성도 있는 구성과 글을 써 내려갈 수 있게 만들어 줬다. 그 분과 몇 번의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내심 이러다가 혹시 계약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열심히 그분이 요구하는 것들 그리고 보완하면 좋을 것들을 해 나갔다. 그러나 역시 마지막에 돌아온 대답은 'NO'였다. 사실 그렇게 되고 나선 모든 게 허망했다. 노력을 해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제 진짜 마지막 남은 희망까지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기회는 늘 생기기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난 스스로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할 수 없었다. 해야만 했다. 남들은 나더러 책을 출판한 것에 대해 "대단하다." 혹은 "멋지다."라고 하지만 이는 전혀 멋지지도 대단하지도 않다. 그저 살아내기 위한 처절한 발버둥일 뿐이었다.
독립출판은 성공이냐 실패냐를 가늠 짓는 잣대가 되지 못했다. 그저 이왕 시작했으니 끝은 봐야 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어떤 성과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나라는 작은 개인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유명해져 글쓰기만으로 먹고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기간에 말이다.
물론 출판사와 계약하여 책을 냈다 하더라도 신인 작가가 갑자기 유명해져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독립출판보다는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만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시작한 독립출판은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다. 펀딩부터 성공적이었으며, 여러 신문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고, 심지어 신문 지면에 내 책이 실리기까지 했다.
더 나아가 국내 유명 출판사에서 출간제의 까지 받았으니 내 인생은 그야말로 성공대로를 탄 듯했다. 물론 출판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유명 출판사 편집자가 좋게 봤다는 것은 내 책이 그만큼 좋은 책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만들었다.
그 후 난 글쓰기 능력을 인정받아 카피라이터로 광고회사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던 독립출판으로 너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건 29살의 나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난 그저 주어진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다. 그러니 누구든 그렇지 않겠는가. 누구도 한 치 앞을 상상할 수 없는 게 삶이다. 그러니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 원하는 대로 사는 게 가장 잘 사는 방법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