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읗 Jul 09. 2023

나의 선생님께


어릴 적 남아 있는 기억 속의 한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매주 아파트 옆라인으로 향하는 일이었다.

중학생 시절의 일부와 고등학생 시절 일부를 함께 보냈던 영어 과외 선생님 집이었다.

우리 집 바로 옆동에 사셨던 선생님은 엄마의 지인이기도 했다.


중학생 시절, 충격적인 성적표를 보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끝에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공부해야 될 것 같아요."


그렇게 처음으로 과외라는 걸 받게 되었다.

당시 우리 집은 과외까지 받을 정도로 넉넉지 않았다.

그랬기에 엄마는 다시 일을 나가야만 했다. 아들 과외비를 벌기 위해서

나중에 알게 됐지만 돈이 부족해서 영어 선생님께 엄마는 몇 번의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과외비를 늦게 드리거나 아니면 나눠서 드리는 등 지인이기에 부탁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지인이기에 더 부탁하기 꺼려지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엄마에게 선생님은 늘 기꺼이 사정을 이해해 주셨고, 기꺼이 받아들여주셨다.




영어에 전혀 자신 없는 난 단어 외우는 것부터 문장 독해를 하며 문법을 배우는 것까지

몇 년을 걸쳐 선생님께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학교를 마치고 나면 매주 2번씩 과외를 하러 옆 동으로 향했다.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를 왕복하며 난 조금씩 성장했다.


처음 시작할 때 영어 실력은 시험에서 20~30점 받던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80~90점을 받을 정도로 성장해 나갔다. 나의 성장의 발판이 되어주셨던 것도 선생님 더분이었다.

항상 온화한 미소로 늘 나를 맞이해 주셨던 선생님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오렌지 주스를 내어 주셨다.

난 아직도 그 오렌지 주스를 잊을 수가 없다...


온화한 미소를 가지고 계셨지만 이따금씩 정신을 차리지 않는 나에게 꽤 강하게 호통을 치시기도 하셨다.

하지만 그때뿐 선생님은 다시 온화한 미소와 말투로 돌아오시곤 했다. 그런 선생님이 난 좋았다.




사실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이 되리라고는 고작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겐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된 원동력에는 역시나 독서가 있었다.

성인이 되고 본격적으로 독서를 시작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돌이켜보면 나의 독서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 것은 영어 선생님 댁에 방문하면 공부방에 비치되어 있던 수많은 책들이었다.

선생님의 남편분은 대학 교수님이셨고, 아들과 딸은 모두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그래서일까 공부방에는 꽤 다양한 책들이 있었고, 난 거기서 처음으로 장편 소설을 읽게 되었다.

첫 번째 장편 소설은 바로 '삼국지'였고,

두 번째 장편 소설은 바로 '셜록 홈즈'였다.


선생님 댁을 방문할 때마다 난 한 권씩 책을 빌려갔다.

그때마다 선생님께서는 흔쾌히 허락해 주셨고, 난 다 읽은 뒤에 반납하곤 했다. 물론 무료로..

시키는 영어 숙제는 안 하고 맨날 책만 보고 읽는 나를 두고 뭐라 하실 만도 한데

내 기억에는 그랬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숙제를 빠진 날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나름 성실함에서는 꿇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나의 독서력은 그때 길러진 것 같다. 10편으로 이뤄진 삼국지에 매료되어 방학 때 주구장창 읽었던 기억이 나며, 설혹 홈즈에 빠져 추리소설의 길로 들어가 군 생활 때도 내내 히가시노 게이고 책을 사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의 독서 역사는 점점 발전하여 글쓰기라는 형태로 변하게 되었고, 그것은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니 어쩌면 선생님의 호의와 관심은 지금 나의 글쓰기와 나를 있게 해 준 충분한 영향이 되었다는 생각을 '오늘'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했으며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서울로 정착하여 지금에 오기까지 사실 크게 선생님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기 전 엄마와 선생님 그리고 나 셋이서 식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을 본지가 무려 10년 전이다.


엄마를 통해 가끔 안부를 듣곤 했지만, 가게를 시작한 엄마도 점점 선생님과 멀어지게 되었고, 관계는 드물게 이어지게 되었다.


모든 관계가 그렇듯 영원할 수 없고 계속 보고 만나고 연락하고 지내기란 어렵다. 하지만 한때라도 친하게 지냈고, 만남을 이어갔으며 교류를 쌓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끔은 조금 더 연락을 할 걸 한 번이라도 더 볼걸.. 같은 아쉬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럴 때면 항상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토, 일 주말 동안 가평에 1박 2일로 여행을 다녀왔다.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오늘 오후 서울로 귀가하던 중 잠시 카페에 들러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고,,, 오늘 새벽 5시 선생님의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울먹이는 엄마의 목소리에 무슨 일이 있나 싶었는데 누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누구 엄마, 너 영어 선생님" 하는 순간 누군지 깨닫게 되었다. 잊고 지냈던 선생님이었다.


순간 난 그럴 때가 아직 아닌 것 같은데 왜?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그다음으로 부산으로 내려가야 하나? 연차를 쓸까? 생각을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장례식장은 집에서 가까운 신촌 세브란스 병원이었다.


서울에 도착하고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고 병원으로 향했다. 향하는 내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그리고 기독교 장례식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떠올리며 걸었다. 그리고 지난 시절에 보냈던 기억들이 하나씩 새록새록 피어났다.


조문을 마치고 상주분들과 인사를 나눴다. 나를 모르실까 봐 나를 설명드렸다.


"저 고등학생 때 선생님 댁에 과외받으러 다녔던 옆동 살던..."

"아! 희재?"


단번에 알아보셨던 형과 교수님이었다.

너무 감사해하시던 교수님과 집에서 자주 봤지만 제대로 인사도 못 나눴던 형 그리고 여동생까지...

이렇게 다시 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것도 췌장암보다 더 독한 담도암으로 말이다.

1년 정도 투병 생활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것 같다.

얼마나 괴로우셨을지... 아마도 세브란스 병원에 계셨던 것 같은데

이렇게 가까이 계셨다는 걸 알았더라면 한 번이라도 찾아뵐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떠나신 뒤였다.


이렇게 황망하게 아내를 잃은 남편의 마음은 어떨까?

이렇게 황망히 엄마를 잃은 아들, 딸의 마음은 어떨까?


나로서는 전혀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아니,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조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이러한데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선생님의 얼굴을 조금 더 길게 간직하기 위해서 로비 전광판에 뜨는 영정사진을 꽤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친구들과 술 먹고 놀던 그 시간에 선생님은 생과 사를 오가셨다는 생각을 하니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지금 이 시간에도 생명은 탄생하며 또 생명이 지고 있을 것이다.


한 번 난 생명이 지무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우린 그 정상적인 일을 반드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일이다.




서울이 싫었던 난 그래도 내가 서울에 있어서 다행이다는 생각을 오늘 처음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기억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기 위해 오늘 글을 쓰게 되었다.


기억과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하지만 글은 기록해 두면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남긴다.


선생님에 대한 나의 마지막 기억을.

그리고 언젠가 다시 꺼내어 볼 때 다시금 기억할 수 있기를.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임을...


이미화 선생님 감사했고 미리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꼭 하나님 곁에서 평안을 얻으시길 축복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운동을 꾸준히 했더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