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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읗 Aug 19. 2020

내 월급이 순삭인 이유

은행에서 일하지만 은행원은 아니에요

성인이 되었지만 신용카드는 29살이 된 후 처음으로 써보게 되었다. 그때까진 계속 학생이었다가 해외에 거주했기 때문에 신용카드를 만들 수가 없었다. 사실 신용카드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 뭔가 카드값을 메우지 못해 돌려 막는 사람들이 있다는 뉴스를 본 후론 쓰면 안 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은행에서 일을 시작하자마자 은행원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건 업무가 아니라 바로 신용카드를 만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어떤 직원이든 처음 오면 사돈에 팔촌까지 다 카드며 계좌며 만들라고 부탁하지만 거의 강요에 가깝다. 심지어는 우리 엄마 아빠 꺼도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데 진심 어이가 없었다. 그것도 계좌만 만들어도 될 텐데 그들은 꼭 신용카드를 만들길 권유한다. 물론 모든 건 다 실적 때문이다^^ 뭐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그럴 것이다. 그렇게 하나둘 만들어서 조금씩 쓰다 보면 이젠 신용카드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사실 신용카드의 기능을 설명하는 걸 은행원들에게 들으면 혹하는 게 많다. 혜택이 주어진다느니 얼마 이상을 쓰면 할인이 된다느니 하는 말들로 유혹한다. 하지만 돈을 썼는데 돈이 나가지 않고 쌓여 있다가 한 목에 나가는 형태는 얼핏 보면 체크카드와 별반 다르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큰 함정이 있다.      


돈이 없어도 일단은 쓸 수 있다는 점이다. 내 수중에 돈 한 푼 없어도 카드값 내는 날이 되기 전까진 쓸 수가 있다. 한도 내로 말이다. 그리고 돈을 썼지만 그게 돈을 쓴 건지 아니면 그냥 숫자를 쓴 건지 피부로 확 와 닿지 않는다. 그냥 카드를 긁는 게 돈을 쓰는 행위라는 걸 뇌가 잘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보통 어르신들은 신용카드라는 것에 대한 신용이 없다. 오로지 현금으로만 쓰시는 분들은 단돈 1만 원도 직접 은행에 오셔서 찾아가신다. 그것도 ATM기기를 이용하지 않고 꼭 창구로 찾아가신다. 한참을 기다리더라도 그들은 꼭 창구에서 돈을 찾으신다.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는 걸 느끼곤 그냥 그러려니 한다. 그들에겐 기계에 대한 신용이 없을뿐더러 그런 편리한 기능이 아마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월급을 받으면 순삭-이라고 한다.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다. 잠시 잠깐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신기루처럼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사라진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분명 월급이 들어왔다는 문자를 받았는데 계좌를 확인해 보면 없다. 한 달 동안 부지런히 쏘다니며 긁은 카드 값 내역이 쫘악- 펼쳐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럴 때면 이놈에 카드를 잘라 버려야지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용카드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할부의 기능을 맛보고 나면 100만 원 넘는 금액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한 번에 낼 것을 몇 개로 쪼개어 조금씩 내면 부담이 덜하고 이자도 붙지 않으면 그것만큼 효율적인 것도 없다. 물론 몇 달 전에 산 컴퓨터 값을 3-4개월이 지났는데도 값을 치르고 있으면 마치 빚같이 느껴져 찝찝하기도 하다. 그렇게 우린 점점 카드 내역만 늘려가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금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 번은 은행원 A와 이야기하는데 자신은 할부로 물건 사는 걸 싫어한다고 그냥 일시불로 다 산다고 했다... 음 얼마나 돈이 많길래... 약간 자괴감이 들었다.




요즘은 온라인 결제가 너무 간편화 되었다.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기능이 너무 좋다 보니 돈 쓰는 걸 그냥 물 쓰는 것 마냥 쓸 때가 종종 있다. 지문인식 한 번이면 몇십만 원 쓰는 건 일도 아니다. 배달이 워낙 잘 이뤄진 한국에선 방구석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다. 밥도 시키면 30분에서 40분이면 온다. 그리고 택배도 아침에 주문하면 오후에 오는 세상이니 이 얼마나 편한 세상인가. 하지만 돈을 쓸 수 있는 수단이 간편화 되면 될수록 세상은 더욱더 우리의 지갑을 얇게 만든다. 인터넷만 들어가면 온갖 광고들이 판을 친다. 행여나 노트북을 사고 싶어 몇 번 검색을 하면 이놈에 알고리즘은 내가 검색한 노트북 말고도 노트북이란 노트북은 죄다 광고를 띄운다. 여기 가도 노트북 저기 가도 노트북 내가 원하지 않아도 계속 적으로 노출을 시켜 소비를 자극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또다시 우리의 지갑 속 사정을 거덜 내려한다. 돈은 쥐꼬리만큼 버는데 쓰는 건 무슨 임금님 쓰듯이 쓰니 언제 결혼해서 언제 장가가고 언제 돈 모아서 언제 집 사냐고 뭐? 대출이 있으니 괜찮다고? 그냥 피를 말려라 말려.     


대출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대출이야말로 은행을 살리는 가장 큰 화력이다. 은행은 우리가 받은 대출의 이자를 먹고사는 집단이다. 애초에 은행이 만들어진 목적이 바로 이자 때문이다. 그들은 큰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돈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빌려주고 그에 맞는 이자를 받는다. 하지만 사실 은행에 돈이 있다는 말은 전부 거짓말이다. 지급 준비율이라는 걸 들어 봤는가? 예를 들어 내가 은행에 1000원을 예금했다고 하면 그 돈 중 10%만 남겨두고 나머지 90%는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자를 받는 것이다. 대신 예금을 한 사람에겐 예금이자를 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예금하라고 꼬드긴다. 하지만 늘 예금이자는 대출이자보다 작다. 이게 바로 지급준비율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모든 사람이 한날한시에 자신의 계좌에 있는 돈을 다 찾지 않을 거라는 가정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이를 두고 뱅크런이라고 한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마 은행은 부도가 날 것이다. 사실은 은행에 있는 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많지 않다. 지점의 크기에 따라 수용할 수 있는 액수도 다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통장에 찍혀 있는 내 돈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그저 환상일 뿐 그저 숫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은행에서 일하다 보니 돈 때문에 울고 웃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해 오는 사람들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상당히 많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생각보다 신용불량인 사람도 많았다. 가끔 은행원들이 카드값이 연체된 사람 집에 찾아가기도 한다. 연락이 안 되면 찾아가는 수밖에 없는데 사실 가 봐야 돈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돈을 갚지 못하면 그 돈은 고스란히 은행의 손실이 된다.      


돈은 수단이다. 인류 사회에 가장 큰 발전을 이룩할 수 있게 해 준 아주 고마운 존재이다. 하지만 돈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가 되면 삶은 피로 얼룩지게 될지도 모른다. 뉴스를 보면 돈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나 돈 때문에 가족이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는 기사를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은행에서 일하지만 나 또한 돈에 대한 개념이 너무 약해 돈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을 다시 세워야 할 것 같다. 어쨌든 돈 없이 살 순 없고, 난 돈이 좋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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