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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읗 Oct 21. 2020

당신은 삶에서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나요?

서울에서 비정규직으로 산다는 것

서울에서 비정규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알다시피 비정규직이란 것이 가진 약점은 특히나 자본주의가 더욱 밀집된 서울에선 취약할 수밖에 없다. 숨만 쉬어도 돈이 드는 곳에서 먹고 자고 입고 싸는 인간의 욕구를 모두 충족하기 위해선 역시나 자본의 힘이 많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비정규직은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킬만하지 못하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비정규직 인간은 욕구를 점점 제어하기 시작한다. 갖고 싶은 것도 가질 수 없어 포기하고,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없어 포기한다. 이렇게 하나씩 포기를 하다 보면 남는 건 포기를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좋은 집에 사는 것을 포기하게 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포기하게 되고 여유롭게 쇼핑을 즐길 수 있는 것도 포기하게 된다. 내가 하루에 즐길 수 있는 건 하루 두 끼 식사와 커피 한잔이 전부이다. (물론 이것이 누군가에겐 풍요로울 순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함의 기준에서 본다면 지극히 최소한일 것이다.) 그나마 부모님과 서울에 함께 지내고 있다면 조금 사정은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이 밥을 챙겨주실 수도 있고, 한 달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 정도면 돈을 정말 많이 아낄 수 있다. 그게 아닌 월세를 내고 있다면 아마도 궁핍함은 더 심각해질 것이다.


비정규직은 아무래도 계약직이다 보니 불안한 건 사실이다. 기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대출도 받기 힘들다. 튼실한 기업의 정규직 사원이라면 그 회사를 담보로 직장인들은 대출을 받는다. 웬만해선 잘릴 위험이 없기 때문에 은행은 고정적으로 내야 하는 이자를 낼 수 있는 능력과 후에 원금을 제대로 반환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그 반대인 비정규직은 이자를 낼 수 있는 능력도 없고 후에 원금도 제대로 반환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대출을 승인하지 않는다. 물론 대출이 되는 상품도 있겠지만 서울의 원룸을 전세로 얻으려면 정말 최소한 오육천만 원은 있어야 한다. 그 정도를 대출하긴 아마 힘들지 않을까? 대출이 되지 않기 때문에 월세를 낼 수밖에 없다. 정규직보다 월급이 더 적은데 집세는 더 많이 내야 한다. 없는 이는 더 없게 되고 있는 이은 더 있게 된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원칙이다. 월세를 아끼기 위해서 더 저렴한 곳으로 집을 알아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삶의 질은 점점 더 떨어지게 된다. 그렇게 더 낮은 곳으로 향한다. 더 아래로 더 더 더...     


기생충에서 나온 계단


내가 살고 있는 신촌은 대학가로 주변엔 원룸이 많다. 주변엔 굴지의 명문대들이 몰려 있다. 연세대, 이화여대, 홍익대 그리고 서강대까지. 살면서 이렇게 크고 멋진 명문대 학생들이 사는 곳에 나도 함께 살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어쩌다 보니 이곳 신촌까지 오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자취방은 서강대 후문에 위치한 언덕배기에 있다. 신촌역 5번 출구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오면 기다란 언덕이 쭉 펼쳐진다. 그 길을 따라 약 10분 정도 오르면 내가 있는 작은 원룸이 나온다. 말이 언덕이지 진짜 가파르다. 마치 조금만 더 가파르면 기어서 올라갈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이다. 이곳은 내가 서울에서 살게 된 네 번째 집이다. 첫 번째는 낙성대 반지하, 두 번째는 양재 시민의 숲에 위치한 투룸(친구와 함께 살았다.), 세 번째는 세브란스 병원 맞은편에 있던 셰어 하우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인 지금 있는 집까지 4년간 총 4번의 이사를 했다. 1년에 한 번꼴로 이사를 한 셈이다. 전세도 아닌 월세를 살고 있는 난 내 집이 없다. 그렇기에 마치 유목민처럼 서울 땅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중이다.   

   

은행에서 일할 때 은행 근처에 있는 아파트는 서울에서도 아주 유명한 아파트가 있었다. 보통 좋은 아파트의 기준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역세권은 집 근처에 지하철역이나 기차역이 인접해 있는 곳을 칭한다. 역이 집 근처에 있으면 아무래도 출퇴근 길이 단축되어 삶의 질이 높아진다. 생각보다 이 출퇴근이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출퇴근 길이 짧으면 짧을수록 개인의 사생활은 더 길어지기에 삶의 만족도는 높아진다. 하지만 보통 우리가 다니는 회사는 강남, 역삼, 선릉 등 집값이 만만치 않은 곳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돈이 부족한 사람들은 출퇴근 길을 포기하게 된다. 그렇게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평균 시간은 1시간 55분으로 집계되었다. 뿐만 아니라 출퇴근 시간대에 서울 지하철을 타 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지옥철이란 말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출퇴근 시간은 근로시간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옥철을 타보면 이것이 왜 근로시간에 포함되지 않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일하는 시간도 쉬는 시간도 아닌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도 괴롭긴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출퇴근 시간이 길면 삶 전체의 기간을 단축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미국 워싱턴대학의 연구팀은 장거리 출퇴근이 신체 활동과 심장혈관 적합도(CRF)를 떨어뜨린다고 지적한다. 스웨덴 우메아대학의 연구팀 역시 장거리 출퇴근 여성의 사망 비율이 그렇지 않은 여성에 비해 54퍼센트나 높다고 발표했다. 이렇듯 내가 가진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매일 아침 일어나는 무급의 시간은 길어지고 어쩌면 수명조차 갉아먹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발취 “우리의 시간은 공평할까.”)     


역세권 말고도 요즘은 숲세권이 떠오른다. 이는 집과 인접한 녹지 공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수익창출과 직결되는 부분이 커서 중요도가 점점 더 높아지는 추세로 생겨난 (숲+역세권)의 합성어이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선 녹색을 띤 자연을 보기가 쉽지 않다. 사방엔 회색빛 콘크리트로 둘러 싸여 있고, 거리엔 자동차들이 뿜어대는 매연으로 가득하다. 거기다 계절마다 찾아오는 미세먼지까지 더 하면 화창한 날씨와 상쾌한 공기는 허락되지 않는다. 이런 곳에 녹색이 가득한 숲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서울에서 사는 사람들 중 가장 상류층에 해당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역과도 멀고 숲과도 먼 곳에 살고 있는 난 서울에서 중류와 하류 사이에 어디쯤 위치해있을까?     


서울 숲


어느 유명 가수는 합정역 반지하에 살고 있었다. 그가 살고 있는 맞은편엔 거대한 아파트 “메세나폴리스”가 있다. 반지하를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보다 먼저 보이는 그 거대한 아파트를 매일 보며 나의 위치와 그들의 위치의 차이, 이상과 현실의 GAP 그 사이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대들은 어떤 기분이신가요?”     


월세 낼 걱정이 없는 그들은, 햇볕이 비치는 넓은 집에 사는 그대들은, 내일 먹을 밥을 걱정하지 않는 그대들은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지금은 유명해져 그가 말한 “그대들”의 위치까지 인진 모르지만 적어도 반지하는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열심히 노력했기에 그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을 테지만 비정규직에겐 열심히 한다고 비정규직을 탈출하긴 어렵다. 열심히 한다고 신분이 바뀌진 않으니까.     


영화 “소공녀”에선 주인공 미소는 월세 10만 원짜리 단칸방에 살고 있다. 그녀는 가사도우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녀에겐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가 있었다. 담배, 위스키, 남자 친구. 그녀의 삶에 유일한 낙인 이 세 가지만 있으면 그녀는 행복했다. 하지만 새해가 되고 오르는 물가로 인해 담배도 위스키도 심지어 집세도 오르게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남은 건 ‘어떤 것을 포기하느냐’였다. 난 생각했다. ‘남자 친구는 포기하기 좀 그러니까. 위스키나 담배 중 하나겠지?’ 하지만 내 예상은 완전히 달랐다. 그녀는 담배도 위스키도 남자 친구도 아닌 바로 “집”을 포기했다. ‘담배나 위스키는 없어도 살 순 있지만 집은 없으면 살 수 없지 않을까?’하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에 집보다 그것들이 더욱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그녀는 집을 포기한 후 짐을 짊어지고 친구들의 집을 전전한다. 그런 미소의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각자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생각한다. 하지만 미소는 그런 친구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미소는 ‘집’만 없었고, 다른 이들은 ‘집’만 있었다. 우린 어디쯤에 있는 걸까?”    

(네이버 영화 관람평 참조) 


영화 '소공녀'


서울에서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미소처럼 삶을 지탱해주는 정신적인 풍요는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해 봤다. 아마도 그것은 책과 글쓰기이지 않을까? 돈이 너무 부족해서 다음 날 점심값도 없을 때 내가 가장 아쉬웠던 것은 밥을 못 먹는 것보다 내가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딱 내가 원하는 책을 마음껏 사볼 수 있는 만큼만 돈을 벌고 싶다고 생각했다. 비록 아직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있지만 내 삶에 정신적인 풍요만큼은 지켜나가고 싶다. 미소의 삶이 행복한 삶인지 아닌지 나로선 알 수 없지만 그 후로도 미소는 자신의 것을 지키며 살았을진 모르지만 적어도 ‘집’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것을 지키려 했던 그녀의 용기가 돋보였다. 나에게도 미소처럼 나만의 정신적인 풍요를 지켜 나 갈 수 있을까? 밤하늘에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서울에서 나만의 작은 빛들을 놓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비록 아직은 집도 없고, 모든 것이 불안으로 휩싸여 있지만 그럼에도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꼭 쥐고 가야겠다. 


당신은 삶에서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나요? 있다면 그건 무엇인가? 그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한 번쯤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질문이다. 오로지 나를 위한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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