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현대미술 갤러리
주유소와 갤러리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일 것 같지만 그런 부조화가 예상외로 자연스럽게 함께하는 것이 베를린의 매력이지. 힙하다는 베를린에 소문을 듣고 놀러 온 관광객은 도대체 어딜 가야 어떤 힙을 볼 수 있는지 갸우뚱거리다 특별히 힙한 거 못 느꼈다 하며 돌아가기 십상이다. 좋은 곳 힙한 곳은 꼭꼭 숨겨두어 찾아가는 재미를 얻게 하는 것이 베를린스러운 의도치 않은 마케팅이랄까.
숨어있는 수없이 많은 베를린의 보석 같은 공간 중 하나인 이곳은 쇠네베르크 Schöneberg에 위치해 있다. 심플한 하얀 담장 뒤로 대나무가 가득 심어져 있어 자칫 지나치기 쉬운 외관이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빈티지한 듯 모던한 듯 아늑한 카페와 전시 공간이 나타난다. 담장밖으로는 차량이 지나다니고 심지어 베를린지하철 우반(U-Bahn)의 철로가 바로 옆에 있지만 입구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아한 정원에 현대미술 설치작품이 근사하게 맞이한다.
주유소에만 볼 수 있는 캐노피가 상징처럼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주유기가 있던 캐노피 아래에는 여러 테이블이 놓여있어 한 여름 그늘아래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최적의 쉼터가 되었다. 카페 '디 자이트 die Zeit'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을 대표하는 주간 신문으로 이 자이트신문사에서 운영하는 카페이다. 마치 예술과 지성이 함께한다는 의미처럼 이 옛 공간은 카페와 더불어 두 개의 갤러리가 번갈아가며 현대미술 전시를 선보인다.
1950년대 주유소로 쓰이던 이 공간을 2005년도에 갤러리 유딘이 구입했다. 그 후, 2022년부터 약 2년간은 베를린의 예술가 조지 그로츠(George Grosz)를 기념하는 박물관(다스 클라이네 그로스 뮤지움, Das Kleine Grosz Museum)으로 사용하였고 2025년 봄, 원래의 주인인 갤러리 유딘과 더불어 페이스 갤러리가 이곳에서 다시 전시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전시를 관람하며 어쩌면 작가에게는 만만치 않은 공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유리를 통해 정원을 바라볼 수 있는 갤러리는 벽에 아무 작업이 걸려있지 않아도 충분히 가득 찬 느낌이다. 창밖의 꽃과 초록 풀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예술 감상 못지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라니, 내가 갤러리 주인이라면 개인 집으로 사용하고 싶은 욕심은 없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층고가 꽤나 높고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통유리 벽이 많은 이 50년대 레트로한 건물은 사용에 편리하도록 수리되었고 안목 있는 이의 손길이 곳곳에 닿았음이 돌아보면서 온몸으로 느껴졌다. 두 갤러리가 번갈아가며 전시하는 실내 공간 이외에도 정원을 한 바퀴 돌며 흥미로운 현대미술 작품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70년 전 사용하던 주유소의 캐노피 색이 모티브가 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캐노피의 빨간 페인트색이 참으로 매력적이다. 오늘날 보이는 거대한 주유소와는 달리 낮고 아담한 캐노피는 아이들 장난감처럼 미니어처의 사랑스러운 느낌도 있다. 여름의 끝자락 방문했을 때에는 정원의 나무들이 무성하게 초록잎을 뻗어내고 있어 작지만 울창한 숲에서 벽돌빛 레드는 유난히 빛이 났다.
갤러리 유딘이 주최한 엘렌 아키모토 Ellen Akimoto의 회화전이 시작하는 날에 방문했다. 강렬하고 오묘한 회화작업은 공간의 매력에 못지않은 힘이 있었고 조화롭게 잘 어울렸다. 아름다운 그림을 보며 이상적인 공간에 있는 행복은 짧지만 긴 여운이 남는다. 동시에 살짝 들뜨게 되는 흥분감도 있다. 한 공간에서 나와 같은 기분을 비슷하게나마 느끼고 있는 이들과 이 흥미로운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며 둘러보고, 멋진 작업에 감탄하며 그림을 깊게 바라보는 과정에서 느끼는 벅찬 감동은 갑자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복적으로 예술 작품을 감상하며 작품을 감상하러 온 사람들과 알아가며 교류하는 것은 매우 느리고 보이지 않지만 개인의 취향을 다져나가는 일이다. 예술의 안목이 조금씩 자라고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해 이해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기를 바라며 무엇보다 이번 작가는 누구이고 무엇을 전시할까 하는 궁금한 마음이 힘이 되어 매번 전시를 보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