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불안의 이유가 베를린의 겨울이어서였다면 차라리 좋겠다.
몸이 깨어난다. 집안 가득 햇살이 비추니 몸속 세포들이 겨울잠을 깨고 나온 기분이다. 갑자기 부지런해지고 집을 정리한다. 구석구석 살펴보게 된다. 한두 번 고민하던 외출이 자연스럽게 성사된다. 겨울 내내 비축해 두었던 에너지들이 발산한다. 눈뜨면 우선 밖으로 나간다. 지난 몇 달간 쉬었던 조깅을 다시 시작했다. 한동안 열어보지 않았던 옷장을 살펴보고 겨울 동안 말라죽지 않을만큼 의무적으로 물만 겨우 주었던 화분을 돌려가며 해를 잘 볼수있게 해주었다. 인간은 식물과 동물과 동등하게 자연의 한 부분이 맞다. 해가 나면 이렇게 에너지가 바뀌는 것 보면 말이다.
뿌연 안갯속에 잠자코 있던 감각이 깨어나면서 욕구도 높아진다. 더욱 신선한 재료를 찾아 직접 요리를 하게 되고 한동안 뜸했던 친구에게 전화도 건다. 겨울 내내 방치했던 나를 더욱 돌보고 싶은 마음과 함께 여전히 외부의 타인과 연결돼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괜히 봄이 왔다고, 해가 나왔다고 설레는 마음으로 안부 문자를 보내는 내가 낯설지 않다. 매년 맞는 봄인데 언제까지 이렇게 신비로울 수 있을까? "언니는 백 번째 맞는 봄도 설렐 거예요!" 봄이라고 뜬금없이 외치는 나에게 보내준 친구의 메시지였다.
그런데, 모든 욕구가 상승하면서 원치 않게도 소비욕구도 터졌다. 눈뜨면 보게 되는 휴대폰 SNS에 뜨는 광고를 나도 모르게 클릭하고 유심히 보고 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카드를 꺼내 결제를 진행한다. 정신 차리면 어느새 메일함에 주문 완료 이메일이 도착해있다. 나는 평소에 쇼핑을 즐기지 않는다. 사야 할 아이템이 없으면 진열된 물건을 보거나 옷을 입어보는 일이 드물다. 구매 목적 없이 하는 쇼핑은 과연 집중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는 시내 한가운데 번잡스럽 쇼핑거리를 약속장소로 잡았다.
오랜만에 따뜻한 봄날씨에 들떠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겨울 내내 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고 집에만 있는 시간이 길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다 뭐 하나 싶을 정도로 고립감을 느낀 시간이 길었을까? 평소에는 질색하던 붐비는 거리를 교통편도 없는데 굳이 찾아 나간 것이다. 베를린은 지난 이틀 48시간 동안 대대적인 대중교통 파업으로 버스와 지하철이 운행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불만 가득 이슈가 될 법 한 파업인데 날씨가 좋으니 사람들이 적당히 분개하고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예전에 지인은 큰 물건을 사야 할 일이 있거나 계약서에 서명할 사안이 있을 때 날씨가 좋으면 유리하다는 농담도 했다. 우스갯소리인 줄만 알았는데 처절한 몇 개월 동안의 어두운 겨울을 나고 마법같이 해가 뜨는 날을 경험하니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인간은 해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는다.
그렇게 어제와 오늘, 하루에 한 개의 물건을 온라인으로 구매했다. 이게 맞는 건가 싶으면서도 오랜만에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싫지도 않았다. 우연히 들른 소파 판매점에 가서 모든 종류의 소파에 앉아보며 직원에게 장단점을 물어보기도 했다. 찾고 싶던 종류의 카펫도 발견했다. 늘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바라기만 하면서 행동으로 까지 가지 못했던 것들이 해가 남과 함께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무기력과 불안이 장악하던 시간이 한 단락 끝난 기분이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눈뜨면 나 자신이 마냥 쓸모없는 것 같고 의미 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았다. 이 모든 불안의 이유가 베를린의 겨울이어서였다면 차라리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