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을 위한) 사업계획서 작성하기 (정말 싫다.)
그래, 내가 이 회사에 필요한 이유를 알았다. 아니 사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전 직장에서 다양한 일을 했다. 연구보고서 제작, 컨퍼런스 개최, 전문가 컨설팅 사업, 인허가 민원 업무, 시상식 개최, 건물 관리, 공연 제작 지원, 신규사업 기획 등... 그런데 그게 무엇이던, 모든 일의 시작은 사업계획서 작성이었다.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그리고 혹여 대기업을 다니더라도 위와 같은 성격의 문서를 작성하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경험이 있는 내가 이 회사의 IR자료나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내가 바로 회사를 그만둔 이유 중에 하나가, 저 문서질을 도저히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책상 앞에서 일하는 것 말고 조금 더 현장과 가까운 일(한글 말고 어도비를 쓰고 싶었다)을 하고 싶었는데, 그리고 분명히 대표는 할 수 있는 게 엄청 많다고 그렇다고 얘기했는데, 뭔가 속은 기분이랄까. 이러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10년 전 대학교수(일본 사상 교수님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빡빡이였는데 지금은 머리가 있다. 어떻게 된걸까?) 님이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하기 싫은 일도 하는 것이 어른이라는. 그래, 나는 어른이지. 그리고 더군다나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일하는 직장인 어른이지. 그래서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IR자료는 처음이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야!'
2017년 초반 당시 우리 회사는 사업 진행을 위해 크게 두 가지 전략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우리가 직접 공유주방을 오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파트너사(자본을 갖고 있는)와 협업을 하는 것. 그런데 그때 당시 우리 회사에 괜찮은 제안을 한 곳이 있었다. 서울시 산하 공공기관인 서울산업진흥원(이하 SBA). 2016년 말 스타트업 얼라이언스에서 개최하는 커피클럽이라는 이벤트에 대표가 발표자로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우연히 그 자리에 SBA 관계자가 있었다. 당시 그분은 SBA에서 준비 중이던 코워킹 스페이스 '서울창업허브'를 총괄하셨었고, 우리 회사의 공유주방 브랜드 '위쿡'을 여기서 운영해보자는 제안을 하셨다.
공기업을 떠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당시의 나로서는(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며, 아마 평생 변할 것 같지는 않지만), 정부/지자체/공기업 등과 함께 뭔가를 한다는 게,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민간의 영역에서 '운영주체가' 되어 어떤 사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탐탁지 않았다.(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한 번 다시 하겠다) 여하튼 경험적으로 떠오르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담당자가 이 사업에 대한 이해는 제대로 한 것일까?', '분명히 일정이 지연될 텐데', '나중에 딴소리하면서 계획을 바꾸자고 하지는 않을까', 'SBA는 그렇다 치고, 그들의 갑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시 공무원들이나 의회가 꼬장 부리지 않을까?', '우리와의 계약 관계는 불합리하지 않을까?', '양아치처럼 아이디어만 쏙 빼먹으면 어떡하지?', '담당자 말고 팀장, 본부장은 어떤 사람일까', '겁 많은 사람들이 분명 이것저것 하지 말자고 할 텐데'...
나 : 대표님, 꼭 여기랑 해야 되나요? 되도록이면 공공기관이랑은 안 했으면 좋겠는데...
대표 : 하자,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인프라 투자를 하고, 우리가 운영을 맡으면 시너지가 나지 않겠어?
나 : 아마 우리 돈도 못 벌고, 위쿡이라는 브랜드도 못 쓸 수 있어요.
대표 : 그게 무슨 말이야?
나 : 그게 그러니까요. 공공기관은 예산이... 공공의 이익... 무료로... 돈을 받으면 골치 아파하고... 위탁사업... 자기네 사업이라고... 갑을관계 형성... 사업은 산으로 저 멀리 가고... SBA는 괜찮은데... 특히 그 위의 공무원들, 의원들... 1년 단위 예산... 쫄보... 전시성... 성과측정... 민원...
대표 : 하나씩 풀어가면 되지. 할 수 있어.
나 : 네... 알겠습니다.
결국, (공무원을 위한) 사업계획서 작성하기가 시작되었다. 기존 우리 회사에서 작성하던 사업계획서와 이 새로운 버전의 차이점은 엄청나게 많지만, 제일 중요한 한 가지를 꼽자면(그 외 수많은 차이점들을 양산해 내는 아주 근본적인 차이점) 바로 '시장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 방식과 이로 인한 사업 목적의 불일치'이다.
시장의 현상 :
포화상태의 음식점 시장, 낮은 영업이익, 높은 폐업률, 과도한 시설설비투자, 보수적인 국내 식품회사, 투자는 하지 않고 베끼는데 앞장서는 대기업, 유통으로 좌지우지되는 시장환경, 하도급 업체가 된 식품공장,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 재기불능의 자영업자 등.
심플프로젝트컴퍼니의 해석 :
리턴에 비해 리스크가 너무 크군. 초기 (시설) 투자비용이 심각한데? 한 마디로 망하면 X 된다. 공유경제 개념으로 초기 투자비용을 줄여 보자. 도전할 사람은 도전하게 하고, 망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괜히 돈 많이 들여서 폭망 하지는 않게 하자. 길게 보면 F&B 시장에 다양성도 생기고 나아가 경쟁력이 생길 거야! 그래서 결론은 > 음식점 차리지 말자.(될 사람만 차리게 하자.)
공공의 해석 :
요즘 쿡방, 맛집 이런 거 보면 F&B가 뜨는 게 맞긴 맞아. 근데 창업이란 굉장히 어렵지. 우리가 도와주자! 전문가들 붙여주고, 연습할 기회를 주면 맛집이 탄생하지 않을까? 요즘 청년창업, 공유경제에 대한 예산도 많으니, 충분히 연계할 수 있겠어. 올해 사업 시작하면 실제 6개월 정도 기간 있으니까, 함 해보자! 그래서 결론은 > 음식점 많이 차리자.
정말 싫고, 이걸 내가 해야 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SBA 관리자과 서울시 공무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관점에서 사업계획서를 한 줄 한 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직장인 어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