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슬 Jun 09. 2024

리스닝은 겉절이

발효와 식감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했다. (바깥은 여름 '입동', 김애란, 문학동네)

소설이란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라고 말한 김애란 작가를 추앙하는 나는 쩨쩨하게도 리스닝을 이렇게 부른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예술



꼴찌 학생에게 리스닝은 공부가 아닌 예술이며, 겉절이를 닮았다고 말하니 쓴웃음을 짓는다.


겉절이는 담근 지 일주일이 지나면 바삭함을 잃기 시작한다. 리스닝 점수를 올리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하여 언어의 형태론과 통사론까지 파고들어서는 아이가 생기를 잃을 수 있다. 영어입문자에게는 리스닝 공부가 덤벼볼 만하다고 느끼게 해 주고, 겉절이의 시간인 일주일 안에 '해볼 만하다'는 기분을 주어야 하는 것이 나의 의무다.


김치 입문자에게 묵은지보다는 겉절이가 쉬운 이유는 아삭한 식감과 덜 매운맛 때문이다. 촘촘한 단어장이나 두꺼운 문법책 대신에 노래 가사와 영화 대사를 가지고 영어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리스닝 공부는 상대적으로 진입장벽이 낮다.


겉절이가 끝내주는 칼국수 전문점에서는 칼을 사용하지 않고 배추를 일일이 찢어 양념에 버무린다. 불규칙한 배추의 절단면은 양념장이 구체적으로 스며들 수 있도록 구멍을 마련해 둔다. 이런 정성스런 겉절이는 길이와 크기가 제각각이어서 먹을 때마다 입속에서 터지는 양념의 농도가 매번 다르다.  

리스닝을 할 때, 전체 문장을 전부 알아듣지 못해도, 나의 꼴찌 학생처럼 들리는 단어들을 간추려 정답을 찾아가는 것도 리스닝에서만 통하는 방법이다.


리스닝 시간은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꼴찌 아이에게는 영어가 휘리릭 소리로 들릴 텐데, 막연한 소리로 가득 찬 그 시간은 지루할 수밖에 없다.  이 아이가 리스닝 시간을 제 편으로 만드는 순간, 영어 소리는 더없이 정갈하고 또박또박 들릴 것이다.

이전 06화 독해는 묵은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