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친구 사무실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2014년 봄, 출판사를 창업한 이 친구는 대학 시절에 만난 동기 황씨다. 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또다시 방황의 시기를 보내던 나를 친히 이곳으로 인도하시어 앉고, 엎드리고, 기댈 자리를 하나 내어주셨다. 아아, 감사합니다. 황씨와 함께 동업을 하고 있는 미남 대표님도 꽃미소를 날리며 기꺼이 반겨주셨다. 아아, 눈부시게 감사합니다. 그렇게 더부살이를 시작한 지 어언 5개월째.
황씨와 나는 나란히 앉아 틈틈이 대놓고 수다를 떨기도 하고, 우리만 알아야 할 은밀한 이야기를 나눌 땐 메신저 창을 열어놓고 타닥타닥, 손으로 수다를 떨기도 한다. 그날의 대화도 그랬다. 우리끼리 은밀하게.
-나 점 보러 갈까?
투다다다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전속력으로 달려 나간다.
-왜? 나한테 말해봐. 내가 먼저 봐줄게.
-오늘 아빠 택시 또 사고 났대.
-헉. 괜찮으신 거야?
-어, 다행히 아빠는 안 다쳤는데 차 문을 다 갈아야 하나봐. 차 고치는 데 또 돈 들어가는데…. 나 취직해야 할까?
갑자기 황씨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아, 안 되겠다. 우리 들어가서 얘기하자.”
나는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황씨와 함께 탕비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믹스 커피를 한 잔씩 옆에 두고 테이블 앞에 마주앉아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점쟁이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다.
“저는 지금처럼 출판사에서 교정 일감을 받아 제 생활비를 충당하며 나머지 시간에 저의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빠 몸도 안 좋아지시고 사고도 나는 걸 보니 제가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해서 집에 돈을 보태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취직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이대로 살아도 될까요?”
점쟁이 대신 내 말을 유심히 듣고 있던 황보살님은 이렇게 답했다.
“취직이 꼭 답은 아닙니다. 취직을 하더라도 당신은 계속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릴 겁니다. 그럼 괴롭겠죠. 대신 지금보다 조금 더 치열하게 사세요. 당신은 너무 여유롭게 살고 있습니다. 물론 잘 노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프리랜서는 시간이 곧 돈입니다. 일감을 정기적으로 더 받아 하면서 돈도 조금씩 모으고, 본인의 글도 쓰세요. 저는 돈을 악착같이 모은 타입이긴 합니다만 서른 중반에 모아놓은 돈이 몇 천만 원도 안 된다는 건 반성하셔야 할 일입니다.”
황보살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지난 5개월 동안의 내 삶이 머릿속을 빠르게 뛰어다녔다. 늦잠을 자고, 주말이면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술을 진탕 마신 뒤 다음 날까지 흐느적거리고, 답답하다며 일본 가는 지인들을 따라 훌쩍 떠나고, 오락과 인터넷 서핑으로 짬짬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그러면서 한 번 잡은 일감을 몇 달째 보고 있고, 들어오는 일감은 글 써야 하므로 못 받는다 내치고, 글은 글대로 쓰지도 않고…. 내 과거가 만들어낸 발소리가 쿵쿵쿵 머리를 때리고 가슴을 찼다.
“네, 지금부터 조금 더 치열하게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렇게 상담을 끝내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기분이 점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래, 내가 치열하게 살지 않은 것, 그동안 너무 천하태평하게 굴었다는 건 인정하겠어. 하지만 사람마다 삶의 방식이 다른 걸. 모든 사람이 이 나이에 몇 천만 원을 모아놓아야 하는 건 아니야. 서른 중반 여성이 모두 결혼해서 아이 한 명쯤 낳은 뒤라야 하는 건 아닌 것처럼. 난 내 성정에 맞춰 삶을 선택한 것뿐이야. 하지만 그래, 내가 치열하게 살지 않은 것, 그동안 너무 천하태평하게 굴었다는 건 맞아. 아, 우울하다.
그래서 결심했다. 황보살님 말씀에 따라 일감도 더 받고, 일주일에 한 편씩 에세이도 쓰겠다고. ‘프리랜서는 시간이 곧 돈이다’라는 황보살님의 말이 등짝에 달라붙어 엉덩이를 철썩철썩 내리쳤다. 나,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거였어.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자 20년 지기 친구 한정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옛말에 친구는 닮는다 했던가. 아, 옛말에 유유상종,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있었지. 서른 중반이 되도록 몇 천만 원을 모아놓기는커녕 통장 잔고가 몇 만원에 불과한 그녀. 지금까지 살면서 회사에 취직이란 것을 해본 적 없으며, 아르바이트도 3개월만 하면 얼굴이 썩어가는,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는 그녀. 집안이 잘사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은 이런저런 병치레를 하시며, 가방과 인형을 만들며 살겠다는 꿈을 가진 내 친구 한정오.
아빠의 사고 소식부터 근황, 내 마음을 모두 쏟아내는 동안 그녀는 “어”, “응” 적절히 추임새를 넣으며 묵묵히 들어주었다. 내 말을 전혀 끊지 않고, 간혹 자신이 궁금한 걸 물으며. 20년 지기가 가진 힘이란 이런 건가. “어”, “응” 이 단답형 말이 어깨 위에 내려앉아 가만가만 날 보듬어주었다. 나를 질책하지 않고, 잘 살고 있다며 의미 없는 위로를 건네지 않고, (내가 말하는 도중 가끔 딴짓을 하는지 덜컹덜컹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호들갑스럽게 걱정하지 않고 그냥 내뱉는 “어”, “응” 이 말이 내 마음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야, 너도 로또 사.”
으응?
“지난번에 당첨 번호가 12, 15, 24 그렇게 시작했는데 내가 산 번호는 11, 14, 25였어. 한끝 차이야. 이제 다 왔어.”
으으응?
“뭐가 다 왔다는 거니? 그건 그냥 안 맞은 거잖아!”
“아냐, 좀만 기다려봐.”
그래, 친구야. 조금만 기다리면 로또에 당첨되어 우리 모두 돈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거니? 나도 철딱서니 없이 산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너도 마찬가지구나. 친구야 너, 이렇게 살아도 되겠니?
근 1년간 술자리에서 가장 많이 내뱉고 들은 단어의 순위를 매긴다면 단연코 1등은 ‘욕심’이 차지할 것이다. 사람들은 욕심이 너무 많다, 아무것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모두 다 가지려 하기 때문에 번민하고 괴로워한다, 모두 다 가지려 하기 때문에 나를 해치고 남을 해친다, 자기 욕심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무엇을 욕심내고 있는지도 모르고, 남들이 다 가지고 있으니까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 좋을 것 같으니까 손에 잡히는 대로 혹은 남의 손에 있는 것도 빼앗아 내 욕심을 채우려 한다, 우리는 그러지 말자, 내 안을 잘 들여다보고 내가 진짜 바라는 게 뭔지 살펴서 능력껏 주제껏 하나하나 채워나가자, 욕심에 잡아먹혀 괴물이 되지는 말자.
그렇게 다짐했건만 결국 나도 모두 가지려 욕심을 내고 있었다. 일을 조금만 하고 태평하게 놀건 다 놀면서 부모님께 생활비를 보태 드리고 싶기도 했던 거였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나와 부모님께 척척 용돈을 안겨드리는 든든한 딸내미를 동시에 꿈꿨다. ‘자유로운 부자’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돈을 조금 버는 대신 자유를 얻고, 자유를 헌납한 대신 돈을 얻는 것이 이 사회, 이 현실의 실상인 것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특출 난 재주도 없고 한량처럼 놀멍 쉬멍 일하멍 지내고 싶은 내가 다다르기엔 너무 먼 목표 지점이었던 것을. 그 두 가지가 다 가지고 싶어서, 욕심을 채우고 싶어서 점쟁이를 찾고, 황보살을 찾고, 한정오를 찾았던 거다. 그리고 또 아프게 깨달았다.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으면, 두 욕심을 100퍼센트 채울 수 없으면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선택하거나 두 욕심을 50퍼센트씩만 채워야 한다는 것을.
“지금 나는 삶을 즐기고 있다. 한 해 한 해를 맞을 때마다 나의 삶은 점점 즐거워질 것이다. 내가 가장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서 대부분은 손에 넣었고, 본질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단념했기 때문이다.”(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