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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주 Feb 01. 2016

이번 생은 틀렸어

하루가 다르게 흰머리가 늘고 있다. 어른들껜 죄송하지만, 늙어가고 있다. 머리카락도 점점 빠진다. 어릴 때 난 숱이 많아 손이 작은 엄마가 낑낑대며 머리를 묶어줘야 하는 아이였다. 유독 까맣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골목을 뛰어다니던 아이였고, 동네 아이들과 머리카락 싸움이라도 벌일라치면 굵은 머리카락을 앞세워 승승장구하던 그런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옆머리를 들추면 허연 두피가 보이고, 실처럼 가늘어진 머리카락은 바람에 힘없이 흔들리는 새치 많은 어른이 되어버렸다. 머리카락 싸움을 벌인다면 필패는 따 놓은 당상이다. 아, 옛날이여!

몇 년 전, 머리를 감을 때나 말릴 때 바닥에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머리를 싹둑 잘라버렸다. 긴 머리를 자르고 커트 머리가 되었더니 몸이 가뿐해진 듯했다.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카락 수야 똑같았겠지만 길이가 짧아지니 훨씬 적어진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 뒤로 줄곧 짧은 머리를 고수해오고 있다.

눈속임은 눈속임일 뿐 늘어날 리 없는 머리카락은 여전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은 형체들을 보며 한숨 쉬기 일쑤. 앞머리, 윗머리, 뒷머리는 그나마 괜찮은데 옆머리가 빈곤하다. 신경 써서 옆머리를 띄우지 않으면 오후 서너 시쯤 세모꼴로 머리가 주저앉는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땐 엄마들이 왜 그렇게 볼륨을 강조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부자연스럽게 띄운 머리는 부끄러움 그 자체였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절절히 이해한다. 머리카락이 가늘어지고 빠지는 것은 나이 듦의 증거였고, 엄마들의 힘 준 머리는 나이 듦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나폴나폴 흩날리며 미용실에 갔다.

“어떤 서비스 받으실 거예요?”

“파마해주세요.”

“어쩐 일로 파마를 다 하세요?”

약 1년 동안 내 머리를 맡아 관리해준 원장 선생님이 의외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어떤 스타일로 해드릴까요? 생각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베이비펌으로 해주세요.”

원장 선생님의 낯빛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베이비펌은 너무 뽀글거려서 안 어울리실 것 같아요. 적당히 볼륨펌으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강하고 오래 가는 파마를 원했지만 의외로 나는 남의 말 잘 듣고 포기가 빠른 사람이다.

“네,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머리를 감고, 자르고, 파마약을 바르고, 돌돌 말고, 윙윙 돌아가며 열을 내뿜는 기계 속에 머리통을 집어넣는다. 이 모든 과정을 원장 선생님과 그녀의 조수가 함께한다. 원장 선생님의 조수는 키가 크고 젊은 데다 잘생긴 훈남이다. 이 훈남이 내 머리를 감겨주고, 파마약을 바른 머리카락을 한 줌씩 손에 쥐고는 돌돌 말아준다. 서비스를 받는 내내 눈과 마음이 훈훈하다. 그런데 이 훈남, 참 거침이 없다.

커트를 할 때 잘린 머리카락이 우수수 얼굴로 떨어졌다. 그걸 스펀지로 털어주던 훈남이 내 입술에 붙은 짧은 머리카락 한 올로 망설임 없이 손을 뻗는다. 어머. 낯선 남성의 손길에 순간 긴장했던 나는 ‘요즘 애들은 타인과 닿는 것에 거리낌이 없구나’라고 생각하며 훈남이 입술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길 얌전히 기다린다. 훈남의 거리낌 없는 행동은 계속된다. 머리를 감겨준 뒤에는 내 허리를 가볍게 손으로 밀며 내가 앉아야 할 자리로 안내한다. 어머. ‘얘, 내가 안경을 벗어서 앞이 흐릿하긴 하지만 그래도 알려주는 자리를 찾아갈 수는 있단다.’ 파마가 모두 끝난 뒤 드라이를 할 땐 내 손에 핸드 마스크팩을 끼워주었다. 에센스가 잔뜩 발린 비닐장갑을 손에 낀 채 멀뚱하니 있자니 이렇게 손을 주물러줘야 영양분이 흡수된다며 내 손을 잡고는 조물락조물락거린다. 어머. ‘얘, 내가 스스로 해도 된단다. 나에겐 왼손과 오른손이 있잖니. 하지만 그래, 다른 사람이 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구나.’

얼마 후 미용실 거울 속엔 뽀글뽀글이 아닌 곱슬곱슬한 머리를 얹은 내가 앉아 있다. 이제 오후 서너 시에도 머리가 세모꼴로 주저앉는 일은 없겠지.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린다. 원장 선생님과 훈남이 문 앞까지 따라 나와 미용실을 떠나는 나를 미소로 배웅한다. 아, 끝까지 훈훈하구나.


그로부터 며칠 뒤,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미용실에 있던 그 훈남이 훈남이 아니라 느끼하게 생긴 아저씨였다면 내가 마냥 얌전히 앉아 있었을까? (물론 며칠 내내 그 훈남을 생각한 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느끼한 아저씨가 입술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었다면 ‘뭐야, 미친 거 아냐? 입술에 붙은 머리카락은 내가 떼어내게 놔둬야지’라고 생각했을 테고, 허리에 손을 댄 채 자리를 안내했다면 ‘뭐야, 미친 거 아냐? 어딜 건드려?’라고 생각했을 테고, 이렇게 해야 손에 영양분이 흡수된다며 내 손을 주물럭거렸다면 ‘뭐야, 미친 거 아냐? 말로 하면 되지 왜 손을 주무르고 난리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내 머리가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하나는 어린 남자 아이가 예뻐 보이는 걸 보면 (어른들껜 죄송하지만) 내가 나이가 들긴 들었다는 것. 둘은 아무리 뭐라 뭐라 해도 사람은 역시 얼굴이라는 것. 그래, 생각해보면 장동건, 원빈을 보며 꺅꺅거리던 내가 요즘은 김수현, 유승호, 여진구를 보며 엄마 미소를 짓고 있었지. 그래, 그 옛날 중국에서는 양귀비의 목을 베겠다고 나선 군인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는 차마 베지 못하고 망설이자 얼굴에 천을 뒤집어씌워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였다고 했지. 그래,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여자는 법정에서도 평균보다 낮은 형량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주워들었었지. 그래, 사노 요코 할머니는 《죽는 게 뭐라고》에서 “얼굴이 몸 전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얼마 안 되어도, 여자는 얼굴이 생명이라는 진리를 70년 동안 충분히 느꼈다”라고 말했지.

예쁘고 잘생긴 사람은 수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사는 것은 물론 심지어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살거나 죄를 감형받기도 하니, 이는 심하게 이야기하면 못생긴 것은 죄요, 죽음의 빌미가 될 수도 있음을 인류의 역사와 통계와 지혜가 그리고 나의 경험이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거울을 들고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본다. 곱슬곱슬 말린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조용조용 손을 흔든다. 외모로만 치면 아이고 예쁘다, 감형 받을 만한 얼굴은 아니다. 딱 지은 죄만큼 죗값 받을 만한 얼굴, 목을 베겠다고 나선 군인이 서두르지도 망설이지도 않고 적당한 속도로 칼을 휘두를 만큼, 딱 그만큼의 외모다. 이번 생에서 미녀로 사는 건 불가능. 다음 생을 기약해야지.

그래도 서른 중반이 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젊음은 젊음 그 자체로 예쁘다던 어른들의 말씀이 정말이었다는 것. (젊었을 땐 젊다는 것만으로도 예쁘다고 아무리 말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거짓말하지 마세요!’라고 외쳤으니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느냐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 욕심 많은 사람은 얼굴에 볼록볼록 욕심이 붙어 있고, 우울한 사람은 이마에서 턱까지 잔뜩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사나운 사람은 얼굴도 뾰족뾰족 매서워진다는 것.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 있고, 생각이 맑은 사람은 총총한 눈빛을 지니고 있고, 그 밝고 맑고 따뜻한 마음과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 못생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며 심지어 예뻐 보이기도 한다는 것. 아무리 잘생기고 예쁜 사람도 누군가와 마음이든, 말이든, 물질이든 주고받을 줄 모르면 매력 없는 그냥 인형 같은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서른 중반이 된 나는 결심했다. 그래, 이번 생에서는 이걸로 승부를 보자. 외모가 아닌 매력으로! (왠지 좀 구차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착각이겠지?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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