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 이동의 그 날. 자리를 옮겨야 하는 날이다. 원래는 금요일에 옮기려고 했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금요일 이동이 불가능했고, 월요일에 옮기게 되었다. 처음 가는 부서에, 부사장이 팀장인 조직에, 가장 기분 안 좋고 업무 회의에 바쁜 월요일 아침에 옮겨야 하는 난이도 있는 상황이어서 일요일 밤부터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건물을 이동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층만 옮겨도 되어서, 금요일에 박스 하나를 구해와 얼추 짐을 넣어 놓고, 월요일에 모니터 등은 의자에 얹어서 같은 부서원의 도움을 얻어서 짐을 올려갔다. 아직 업무 시간이 30분 이상 남아서 우리 섹션에는 부서장님 한 분만 자리잡고 계셨다. 인사를 드리고, 짐을 풀기 시작했다. 주변을 살펴 보았다.
이번 조직개편은 역대급 규모였기 때문에, 나 한사람이 아닌 5~60%의 인원이 움직이게 되었고, 특히 내가 가게 된 조직은 팀장도 바뀌고 근무하는 건물도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 짐을 싸서 주말에 업체 도움을 받아서 짐이 옮겨졌고, 사무실에는 쌓아놓은 짐만 이 자리, 저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쌓아놓은 짐이 얼마나 그 사람을 표현해주겠나만은, 수없이 짐을 싸 본 경험자로서 박스 두 개에 쌀 수 있는 짐은 매우 단촐한 것이라서 나름 미니멀 라이프를 표방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직장맘으로서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그 흔한 아이들 사진 혹은 아이들이 그린 그림 하나 붙여놓지 않고, 장식물 없이 단촐한 내 책상은 몇 개의 책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짐을 쌀 때 마다 이렇게 쉽게 쌀 수 있는 걸 왜 그걸 못 버려서 다 싸짊어지고 다니냐고 짐 많은 동료를 타박하는 건 나의 고정적인 레파토리였다.
그런데 이 부서에 와서는 그 나의 미니멀한 이미지가 먹히지 않겠음을 박스 갯수로 직감하게 되었다. 쌓여 있는 모든 짐이 박스 두 개, 특히나 대형 모니터가 밀어 올린 박스 뚜껑 등은 구경할 수 없이 모두 완벽한 직육면체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심지어 박스가 한 개인 책상도 눈에 띄었다. 분명히 듀얼 모니터를 쓸텐데 한 개의 박스에 노트북, 모니터, 전화기에 모든 세간 살이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한 명, 한 명, 미니멀 라이프를 실현하고 있는 친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짐의 이미지와 똑같이 모두 단정한 인상을 가지고, 모두 군살 하나 없는 몸매에, 딱 맞아 떨어지는 옷을 입고, 모두 친절하게 나를 맞아 주었다. Unbelivable! 지나고 생각해 보니, 이 순간이 나의 걱정하던 지난 일주일은 모두 바보같은 일이었고, 내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임을 진심으로 믿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이 곳으로 옮기기로 한 승부수는 내 직장생활에서 가장 잘 한 선택이 될 것만 같다.
이전 부서를 떠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에는 과한 인간관계에 지쳐서 그랬던 것도 크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같이 술을 마셔야 하고, 공동 육아를 표방하며 아이들을 데리고 만나고, 항상 술에 취하고, 항상 누군가는 너무 좋고, 누군가는 진심을 다해 뒤에서 걱정하고, 좋고 싫음을 격하게 표현하는 친구들과 오랜 시간을 있다보니, 진심으로 좋아함도 당했다가, 진심으로 뒤에서 걱정함을 당하는 격정적인 감정선을 넘나들게 되다가 결국은 튕겨져 나왔다. 그런 격렬한 감정선은 탄력좋은 고무줄처럼 강하게 당겼다가 그 반대 급부로 당겼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밀쳐내져서 궤도 밖으로 튕겨져 나가 버린다. 그 당겼던 힘이 너무 강해서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보지만, 이미 자석의 같은 극처럼 튕겨져 나가는 건 시간 문제였다. 격렬하게 당기지도, 격렬하게 밀쳐내지도 않고 항상 일정한 거리만큼의 궤도를 돈다면 서로의 행성들이 어떤 모양인지를 이상하다 보지 않고 다르구나라고 인정해 주었을텐데.
이 단정하고 미니멀 라이프의 친구들은, 물론 처음이라 어색함과 예의는 추가되었지만, 친절하고도 소탈하게 나를 맞아 준다. 나에게뿐이 아니라 몇 년을 보아 온 서로에게도 서로 높임말을 쓰면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과하게 가깝지도, 과하게 거리를 유지하지도 않는 소탈함으로 OJT 계획도, 커피 타임도 선뜻 먼저 말을 꺼내준다. 적응에까지 세 걸음만 가도 충분했지만, 50걸음은 온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