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그러이 이해해주십시오

재직기념패에 적힐 나의 성과들

by 쉬는건 죽어서

우리 부서는 부서 이동할때 선물을 준다. 어르신들이 많은 부서라 퇴직도 이동도 많이 있었는데, 퇴직할 때는 재직기념패, 이동할때는 선물을 주는게 관례처럼 되어 있다. 나는 15년전 부서를 옮길 때 대리때였는데도 희한하게도 재직기념패를 받은 적이 있어서, 이번에 선물 대신 재직개념패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해 두었다. 의례적인 단어가 적히겠지만, 지나고 나면 그 의례적인 단어가 내 역사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언어가 되길래 이번에는 고민없이 재직기념패 받고 싶다고 얘기를 꺼내두었다.




나는 많은 감사패나 재직기념패를 만들어 봤다. 사람들을 이것저것 챙기는게 업무이다 보니 재직기념패를 만들 일이 많았고, 의례적인 단어이지만 어떻게 표현하는게 좋을지 고민도 많이 해 보았다. 그 사람의 업무적인 성과와 가장 대표적인 성격을 넣어서 해주는게 가장 기억에 많이 남고 임팩트가 있다는 결론을 내려서, 신입때는 그렇게 만들기 힘들어했던 감사패 문구를 이제는 쉽게쉽게 만들어 낸다. 캐릭터가 확실한 사람의 경우에는 더군다나 만들기가 쉽다. 불도저같이 일을 추진하던 선배에게는 '열정적인 모습을 잊지 않겠다', 불만은 많았지만 새로운 시각을 많이 제공해주던 선배에게는 '꿈꾸는 청년같은, 새로운 인사이트를 많이 주시던' 이라고 긍정적인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 시각화하면 더욱 좋았음을 알았다. 특히 자주 표현하는 말이나 용어같은게 있는 경우에는 그런 단어를 넣어드리기도 했다.




나의 재직기념패에는 어떤 문구가 쓰일까. 어떤 문구가 쓰이면 진심으로 기쁠까.

이게 바로 회사생활을 어떻게 할까라는 고민과도 사실 일맥상통할 것이다.


나는 항상 열심히 하는 모습이 있지. 새벽이나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외국어 공부나 기술 공부를 계속 해 왔고 외국어 자격증도 3 종류나 있고 항상 책상에는 책이 쌓여있고 독서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으니 과장 좀 붙여서 '자기계발의 여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스스로 부끄러운 점은 셀 수 없이 많으나, 한 줄로 표현해야 한다면 가장 확실한 나의 이미지일 것이다.


거기에 추가로 나의 재능기부를 꽤 했다. 승격때문에 어학 자격증이 필요한 후배들과 스터디 모임을 짜서 매일매일, 9개월 가량을 오픽 전략을 짜주고, 설문 내용을 분석하고, 순서를 정해서 순서에 맞추어 공부팁을 주면서 공부해나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인생 조언까지 곁들여서? 그 결과 어학 자격을 두 단계나 높인 후배가 있고, 아깝게 점수는 못 땄지만 다행히도 아슬아슬하게 승격에 성공한 후배가 있으니 결과는 100프로 성공이었다고 칭하고 싶다. 그럼 '후배 양성의 여왕' 이라고 멋대로 추가해보자.


업무적으로는 정리, 체계화, 가이드 제시, 지표 수립에 제일 탁월? 했던 것 같다. 불완전한 업무 관련 데이터들을 정리해서 체계화하고 그 숫자를 지표화할 때까지 만들어 냈던 것, 보기 편하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내고 없는 가이드는 만들어내고 user interface에 맞추어 쉽게 만들기 위해 지속 노력한 것, 그 부분이 그래도 내가 만들어 낸 부분들인 것 같다. 크게 지원 없고, 끌어주는 사람 없는 상황에서도 꾸준히 내 일을 내가 지키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정리했던 영역들이 있어서 그 점을 인정해주었던 거겠지. 그래서 나는 '체계화의 여왕'이라고 하나 더 멋대로 얹어본다.


여왕 자리 3개나 얻었으니 10년 세월이 허송세월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만조오오오옥 ~~~ 이렇게 한톨 한톨까지 나의 좋았던 지난 세월을 정리하는 건, 그렇지 못했던 나의 부족했던 부분들이 너무 많아서 그건 심지어 정리도 안될만큼 산더미라 굳이 정리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뭐 이미 지났는데 어쩌겠어. 앞으로 잘하면 되지 생각해버린다. 주고 받는 수많은 일들 중에 한가지라도 장점이 있으면 세월이 지나면 좋은 추억으로 기억에 남겠지라고 멋대로 생각하기로 한다.




그래서 선배들은 다 이런 멘트를 남겼나보다. "제가 잘못하고 부족했던 부분은 너그러이 잊어주시고, 좋았던 기억만 기억해주십시오." 상대방의 너그러움에 결국 기대야 하는 것이 이별인사인가보다. "제가 부족했던 부분은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고, (모두 그런 너그러움을 가지신 분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좋은 기억만이 (특히 3개의 여왕님에 맞는 이미지만) 남아있기를 다시한번 바래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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