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노동, 그 사이 어디에서 책으로 살아가기
오랜만에 귀국한 후배와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나갔다. 서로의 근황을 나누는 시간, 자발적 퇴직을 했음을 알렸다. “언니 이제 그럼 일은 안 해요? 요즘 뭐 하고 지내요?” 일은 안 하는데 엄청 바쁘다고 대답했다.
“애들도 다 대학에 가고, 이제 할 일이 없지 않아요? 아직도 바빠요?”
“그래도 할 일이 너무 많아. 책도 읽어야 하고, 독서 모임도 많고, 공부할 것도 많고...”
“부럽네요! 일은 안 하고 취미생활만 할 수 있으니.”
“너도 곧 그런 시간이 와. 조금만 버텨봐.”
“그러게요. 명퇴라도 해야 하나...”
여전히 바쁘다고 말하는 나를 부러워했던 후배들에게 무엇이 부러운지 다시 물을 수 없었다.
일을 안 해서? 하고 싶은 취미생활만 하고 사니까?
<소유하기, 소유되기>의 저자 율라 비스는 그의 책에서 ‘일과 노동을 구별’한 루이스 하이드의 말을 인용한다. 이에 덧붙여 저자는 “일은 우리가 시간제로 하는 것이지만, 노동은 제 속도를 스스로 정한다. 일에는 운이 좋을 경우 돈이라는 보상이 따르지만, 노동의 보상은 변화다.”라고 정리한다. 또한, ‘시 쓰기, 아이 기르기, 새로운 계산법 개발하기, 신경증 해소하기, 온갖 형태의 발명, 이런 것이 노동이다’라는 하이드의 목록을 소개하며, “나는 일이 아니라 노동에 삶을 바치고 싶”다고 쓴다. 일은 시간과 대가로 측정되지만, 노동은 스스로의 리듬을 따르며 그 보상은 변화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일로 바쁜가? 노동으로 바쁜가?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책으로 살아가는 삶’의 위치는 어디인가?
나는 오랫동안 책과 함께 살아왔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또렷하게 정의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직장에 다닐 동안은 명백한 노동이었을 것이다. 일이라고 규정된 구체적인 활동이 있었으니, 그것의 여집합에 속해 있었다. 일이 사라진 지금도 여전히 읽고, 나누고, 기록하는 시간을 쌓아가면서도 이것을 ‘일’이라고 부르기에는 망설여지는 면이 있었다. 그렇다고 단순한 취미라고 하기에는 여기에 쏟는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많다. 그렇다면 뭐란 말인가?
돌이켜보면, 내가 책을 읽어 온 시간은 분명 노동에 가까웠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고, 정해진 기한도 없었다. 그저 읽고 싶어서, 읽어야 했기에 읽었다. 성과라기보다는 축적이었고, 결과라기보다 변화였다. 책을 통해 달라졌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배우고,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그런 변화는 가족들이 가장 크게 느낀다. 우리 집의 평화에 일조하고 있음을 모두 안다. 그래도 고민이다. 여전히 노동의 영역에만 두는 것이 맞을까?
오랜 시간 무료로 운영하던 독서모임을 유료로 전환했다.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읽고 나누는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는 일이 과연 정당한가? 모두에게 환영받을 일인가?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선택이 필요했고, 지금을 잘 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수익을 위한 전환이 아니라, 나의 시간을 책임 있는 형식으로 받아들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함께 읽고, 질문을 만들고, 생각을 이끄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더 많은 준비와 집중을 요구했고, 그만큼 더 깊은 관계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나의 읽기 역시 더 단단해졌다. 돌이켜보면, 나의 시간이 ‘노동’에서 ‘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책으로 살아가는 일’이 일과 노동의 경계 위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 그것은 때로 ‘일’이 되어 나를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 동시에, 나를 변화시키는 ‘노동’으로 남아 있다. 이 두 개의 영역은 분리되기보다 함께 공존해야 한다. 일이 되어야 지속할 수 있고, 노동으로 남아야 스스로를 잃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 율라 비스는 그녀의 일이 있기에 노동으로 채워지는 삶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모든 가능성이 열린 나에게는 일과 노동의 구분이 보다 유연하다. 책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읽는 사람이 아니라, 읽기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변화가 멈추지 않는 한, 이 일은 언제나 나에게 노동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