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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달아쓰기

길 위의 철학자 by 에릭 호퍼

떠돌이 철학자의 삶에 관한 에피소드

by 부키

에릭 호퍼(1902~1983), "머리를 아래로 하고 엉덩이를 위로한 사유 자세"를 실천한 사색가, 떠돌이 노동자, 레스토랑 웨이터 보조, 사금 채취공, 부두노동자 등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은 삶을 스스로 선택하며 몸으로 배우기를 실천한 사람이다. 그에게 일은 배우기 위한 수단이었다. 독학으로 자신의 철학 세계를 구축 한 에릭 호퍼의 많은 아포리즘을 다시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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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교육의 주요 역할은 배우려는 의욕과 능력을 몸에 심어주는 데 있다. '배운 인간'이 아닌 계속 배워가는 인간을 배출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란 조부모도, 부모도, 아이도 모두 배우는 사회이다.

부모가 배우는 사회는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의 필수요소이다. 아이에게만 배움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배운 사람에서 배우는 사람으로 진화해야 한다. 여전히 진행형이어야 하는 것이 배움이다. 배우자.


Power
절대 권력은 선의의 목적으로 행사될 때에도 부패한다. 백성들의 목자를 자처하는 자비로운 군주는 그럼에도 백성들에게 양과 같은 복종을 요구한다.

역사적으로 절대 권력으로 인한 피해는 그 결과가 너무도 참혹하다. 그럼에도 역사가 반복되는 것은 백성들이 양이되었기 때문이다. 양을 이끄는 선한 목자를 우리가 알 수 있는가.


Failure
우리는 주로 자신이 우위에 설 희망이 없는 문제에서 평등을 주장한다. 절실히 원하지만 가질 수 없음을 알고 있는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이 절대적 평등을 내세우는 분야를 찾아야 한다. 그런 시험에서 공산주의자란 좌절한 자본주의자이다.

내가 절대적 평등을 내세우고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서 나의 평등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다시 주장하던가, 받아들이던가, 아님 투쟁하던가.


Hope
절망과 고통은 정태적인 요소이다. 상승의 동력은 희망과 긍지에서 나온다. 인간들로 하여금 반항하게 하는 것은 현실과 고통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들에 대한 희구이다.

절망, 고통 vs 희망, 긍지 고통을 없애려는 것보다 더 나은 상태를 희구하는 것으로 생각을 전환해야 한다. 고통을 없애는 과정은 고단하지만, 더 나아지는 것은 희열이 온다. 결국, 같은 목적지를 향함에도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Language
언어는 질문을 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대답은 투덜대거나 제스처로 할 수 있지만 질문은 반드시 말로 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첫 질문을 던졌던 때부터였다. 사회적 정체는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할 충동이 없는데서 비롯된다.

또다시 질문이 중요해지는 시기가 왔다. 하지만, 우리는 질문을 어려워한다. 나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 우리 사회, 언어를 질문으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질문으로 사고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


Happiness
이런저런 것만 있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불행의 원인이 불완전하고 오염된 자아에 있다는 인식을 억누르는 것이 된다. 따라서 과도한 욕망은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억누르는 수단이 된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 해도 역설적이게도 불행의 경계이기도 하다. 불행하지 않는 것에 더 힘을 쓰자.


Religion
종교는 신이나 교회, 성스러운 동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적 몰입의 근원은 자아에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자아의 거부에 있다. 헌신은 자아 거부의 앞면이다. 종교적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왜냐하면 몽테뉴도 지적했듯이 '자기를 증오하고 경멸하는 것은 다른 피조물에서는 볼 수 없는 인간에 국한된 병'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그때의 나를 용서하는 것이다. 불만을 품으면 후회할 일이 생기기 쉽다. 용서해야 한다.


Hatred
증오가 정당한 불평보다는 자기 경멸에서 솟아난다는 것은 증오와 죄의식의 밀접한 관계에서 드러난다.

정당한 불평에는 증오가 없다. 단지, 상황을 개선하려는 의지뿐이다. 증오의 근원은 자기 경멸이다.


Money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상투어를 만들어 낸 사람은 악의 본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며, 인간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다.

돈에 대해 솔직한 사회가 오히려 건강한 사회이다. 돈에 대해 솔직한 개인이 더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다. 돈을 공부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사는 시민의 중요한 배움이 되어야 한다.



내게 글쓰기는 육체적으로 꼭 필요한 일입니다. 내는 좋아지는 것을 느끼기 위해 글을 써야 합니다. 그건 많은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하여>



노트를 하지 않기 때문에 좋아하는 소설을 옆으로 치운다는 에릭 호퍼, 나 역시 소설을 읽을 때는 편한 소파에 파묻혀 몰입하게 된다. 글로 남기기보다는 심성으로 남기고자 함이다. 하지만, 기록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노트하며 책 읽기, 오랜 습관이지만, 조금 소홀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덕분에 다시 노트를 준비한다. 나의 방식을 다시 찾는다. 나를 좋아지게 하기 위해, 내가 좋아진 것을 느끼기 위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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