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단조로울 수 없을 것 같은 일상마저 신기하게도 더욱 단순해질 수 있는 이상한 한 해를 보냈다. 상상치 못한 기나긴 팬데믹으로 마스크로 얼굴의 반 즈음을 가리고 살포시 그 익명성이 기대어 무미건조한 무표정을 가릴 수 있음에 안도하곤 한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 마스크로 숨쉬기가 불편하다 투덜거릴 땐 언제였는지, 화장기 없는 민낯의 외출에 거침없어지는 고마움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집순이라고 해도 닫힌 공간에서 일상이 무한 반복되다 보면 여행의 갈증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하루가 늘어난다. 난 일 년의 한 두 번의 여행으로도 꽤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기억으로나마 행복이란 공간의 확장을 위해 괜스레 사진첩을 뒤적뒤적, 흐릿한 기억의 단편이라도 끄집어낸다.
2020년 3월 파리와 포르투 여행은 당연히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공연 예약과 항공권이 취소되어 무산되었고, 기억의 짙은 연무 속 꺼낸 여행은 2019년 늦여름의 끝자락 즈음이었다. 그 해 7월엔 암스테르담 거리의 잊을 수 없는 폭염 속 이방인으로 며칠 붉은 감자같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반 스케치를 하고 와서인지, 선선한 바람이 부는 어여쁜 날씨와 처음 가보는 정읍이지만 내 나라이기에 긴장 없는 여행에 한껏 설레며 기차에 올랐다. 기차를 좋아하는 빅뱅이론의 쉘든처럼 차창 밖 풍경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넷플릭스의 ‘Chef’s Table’ 정관스님 편을 보고 반해서 엄마와 함께 떠나는 여행이었다. 정읍역에 내려 갈아탄 택시, 기사님이 135km/h까지도 마구 속도를 올리는 바람에 그림 같은 하늘과 내장산 풍경을 아찔하게 지나쳐 버렸다. 도착하자마자 안도의 숨을 돌리고, 깊은 자연의 색감과 상쾌한 공기에 탄성을 질렀다. 언젠가 단풍이 들 때도 와야겠구나! 그야말로 감사함이 절로 드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공간 디자인을 전공한 나는 종교가 없으나 잘 지어진 성당과 사찰에 들어서면 마치 산소치료를 받는 것처럼 마음의 공간이 치유되는 기분이 든다.
운이 좋게도 샤워시설과 화장실이 있는 커다란 방을 배정받았다. 잠시 빌린 그곳엔 나비가 날아다니고, 3면의 창이 우아하고 맑은 초록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조명을 끄면 은은한 늦여름의 초록빛이 방으로 들어선다.
천진암에서 정관스님과 함께 음식과 명상을 주제로 후각, 촉각, 시각, 미각을 모두 감동시키는 잊을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 평소에 표고버섯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담백하고 고급진 표고버섯의 맛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내려오는 길 하늘에 총총 박힌 별까지도 그야말로 완벽한 하루였다.
이름 모를 길가에 작은 꽃들과 정성스레 칠해진 단청, 햇살을 머금은 나뭇잎, 단아한 연꽃, 모든 것이 아름다운 곳. 나쁜 것을 듣거나 봤을 때 빨리 덜어내는 법을 배우는 곳. 아침과 저녁 호흡에 오롯이 집중하라는 작지만 커다란 조언을 얻는 곳이었다.
백양사 템플스테이는 총명해 보이는 젊은 스님, 효명스님과의 차담, 차분하고 맑아지는 시간으로 마무리되었다. 어느 인생이나 저마다의 사연과 행복과 선택으로 채워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 젊은 분이 왜 승려의 길로 들어섰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진솔하고 곧은 이야기 속엔 수행으로 채워진 지혜가 있었다.
2019년은 내가 딱 마흔인 해였다. 문득, 나는 잘 살고 있는가? 나는 왜 그동안 결혼을 하고 싶을 만큼 좋은 인연이 없었을까? 란 두려움이 들거나, 친구들의 육아로 바쁜 일상을 접할 때마다 조금씩 뒤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아이’라던지 ‘집’이라던지 인생의 새로운 존재가 생긴다면 행복한 만큼의 책임과 무게가 따른다는 것, 타인과 비교의 무게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가지지 못한 만큼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래서 그 가벼움의 자유와 나만의 템포를 좀 더 능동적으로 즐겨보길 결심한다.
또 무엇이 좋았더라 곰곰이 생각해보면 시간이 꽤 흘렀지만 이른 아침, 울력의 시간을 떠올리게 된다. 분명 울력이란 협동의 시간인데, 사람들과 걷고 그 거리를 비질하는 시간 동안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떠올려도 그 힐링의 시간이 참으로 좋았다.
고작 1박 2일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좋을 수 만 없는 것이 삶이지 아니한가? 햇빛, 술, 화장품, 벌레 등 다양한 것에 극도로 예민한 피부를 가진 난 약사암 산행에서 모기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대충 헤아려도 오십 군데쯤 물린 것 같았는데 스키터 증후군까지 있으니 온몸이 여기저기 발바닥까지 띵띵 부어 처참할 지경이었다. 여행 후 집에 가기 전에 피부과에 들러 주사를 맞고, 먹는 약과 바르는 약까지 처방받고도 가려움에 며칠을 더 고생했다.
그렇게 다시는 여름 여행은 가지 말자 결심했는데 일 년 반이 훌쩍 지나, 집콕에 근질근질한 상태가 되자 올여름 혹은 내년 여름이라도 훌쩍 어딘가라도 떠나고 싶다. 역사로 빛나는 어느 도시의 거리가 됐든, 풍광명미의 여유로움에 빠지든, 마음에 휘리릭 지나가는 바람처럼 낯선 공간을 거닐고픈 야심한 잠 못 드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