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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Jan 13. 2021

비움

의도치 않은

가끔씩은 한결같음이 부럽다. 한배에서 나와도 모두가 다르듯 태어날 때 부터 나의 비교대상이 된 오빠는 타고난 우수한 두뇌로 (세상의 뻔한 잣대로 보자면) 당연하단 듯이 엘리트 코스를 밟고, 쉴 새 없이 직장생활을 하고, 이십대의 끝자락에 비슷한 분위기의 동갑의 아내를 맞아, 예쁜 딸, 아들을 키우며 요즘 트렌드처럼 애교 넘치는 반려견까지 오손도손 살고 있다. 그 평탄함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그 삶을 헤아릴 수 없게 난 제멋대로이다.


(주변엔 딱히 말썽꾸러기가 없었으므로) 그에 반해, 성미가 곱살하지 않은 난 라이프스타일의 파동이 거센 편이었다. 공부가 하기 싫은 해는 무념무상 시간을 흘러보내며 나무늘보가 되기도 하고, 책 읽는 것을 삶의 전반에 걸쳐 싫어하면서, 중2 사춘기 땐 집안에 있는 모든 문학 전집을 몰아서 읽는 한 해가 있기도 했고, 갑자기 예고간다고 미친듯이 그림을 그리던 한 달이 있기도 했고, 장학금 타겠다고 밤샘을 한 학기 다음엔 제풀에 지쳐 휴학을 하기도 했다. 늘 과도한 짧은 몰입 후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곤 한동안 빈둥거리며 재충전을 하는 패턴이 반복된다. 학창시절 최상위권과 중하위권 사이로 성적이 날뛰기를 하여도 늘 부족함을 지적하는 아버지와 변함없이 칭찬만 하는 어머니, 극과극인 두 부모 아래에서 자라와서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고, 나름 두 가지의 교육방법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필사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나이가 들어 열정의 대상이 사라졌으나, 습관이 된 것처럼 여전히 바쁜 마감때는 최대한 몰아서 밤샘을 하고, 일이 없을 땐 한 두달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내 몸의 다양한 세포들이 그러한 휴식을 통해 어떤 임계점에 이르면 갑자기 에너지가 넘치는 또 다른 내가 되곤 한다. 마치 한없이 게으르고, 대책없이 열정적인 지킬앤하이드의 두 가지 자아가 존재한다. 그 중도를 찾는다면 참 매력적인 사람이 되지 않을까?


며칠 전 친구의 친구가 브런치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단 글을 읽었다. 2000년 대학생이 되던 해 홈페이지를 만들고, 제로보드에 써내려간 수백개의 글귀들이 문득 떠올랐다. 더불어 미니홈피용으로 몇 줄이나마 쏟아내던 시절 또한.


시간이 꽤 흐르고 다양한 소셜네트워킹 사이트를 경험하는 사이 오랫동안 사용하던 호스팅 업체가 해킹을 당하는 사고가 생겼고, 불안함에 업체를 변경하는 과정 중 백업하지 않았던 글이 낱낱이 흩어졌다. 게다가 사용자를 잃은 미니홈피의 사진과 기록도 모두 의도치 않게 비워졌고 그로인해 아쉬운 마음보단 왠일인지 다시 생각들을 주변에 내보이기엔 쑥쓰러움과 수줍음이 스멀스멀 느껴진 것 같다. 종종 무언가 끄적이고 싶을 때면 해외 지인들과 소통을 하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영어도 올려 달라는 요청까지 있어, 부담감까지 더해졌다. 영어울렁증에 오히려 말을 아끼는 편이 더 낫단 생각이 가득했다.


그래서 옛 제로보드처럼 브런치라는 글쓰는 공간이 반갑다. 솔직히 누가 읽을지 모르지만 다시 비거덕대는 글쓰기일지라도 시작이 반이다. 참, 브런치를 통한 첫 글에서 예순에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면 여행다니고 싶단 꿈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보다 훨씬 더 이른 꿈은 내 스케치와 함께 에세이집은 내는 것이었다. 마음 편하게 일흔 쯤 이루고 싶은 꿈이라고 해두자. 때론 의도치 않은 비움을 통해 새로이 채울 공간을 확보한다.




+덧붙이기


사랑스러운 이 아이는 조카들의 반려견이다. 한달에 한번 즈음 우리집도 놀러와 쌓여가고 있는 내 에너지를 말끔히 소진시키고 대신 아낌없이 저 나름의 사랑을 나누어 주고 가는 사랑스러운 생명체. 늘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이 녀석 때문에 뭔가 폭발적으로 푹 빠져사는 패턴이 사그라드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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