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4기다!] - 8.
통증 경감을 위하여 방사선 치료라도 시작하면 좋겠다는 바람은 패셔너블한 교수님의 '지금 당장은 필요 없을 것 같다'는 한 마디로 끝나버리고, 이제 남은 건 '과연 어떤 약을 먹게 될 것인가'였는데 이는 조직검사 결과가 나와야만 알 수 있었기에 어떤 결과라도 좋으니 그저 어서 빨리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 진료일을 하루 남겨둔 날,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대부분 그렇지만 나 같은 중병의 환자들은 병원에서 전화가 오면 일단 심장부터 덜컹거린다. 대부분의 경우 병원에서 오는 연락은 환자가 듣기 좋은 연락이 별로 없다 보니.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시점에 걸려온 병원 전화에 내려앉을 것 같은 심장을 잘 다독여 전화를 받았더니 "검사 결과를 보니 추가 검사를 더 해야 해서 진료일자를 일주일 늦춰야 할 것 같아요"란다.
이게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난 다시 일주일을 더 기다리며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우울한 결말은 다 생각해 봤던 것 같다. 그러면서 또 뭐 그리 강인한 정신력을 지니지도 않았으면서 짐짓 멋진 척 "나한테 더 좋은 약을 찾느라 그런 거겠지"라며 어머니를 위로한답시고 밝은 척도 해가며 말이지.
유방암은 발병 요인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나뉜다.
케이스가 가장 많은 호르몬 양성 타입부터 허투 양성 타입, 그리고 삼중 음성 타입까지.
각각의 타입별로 특징들이 명확히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더 유리하다거나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호르몬 양성 타입의 경우 발병 요인도 비교적 확실하고 케이스까지 많다 보니 현재까지 연구된 자료들도 많고 그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약도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하여 나와 같이 전이가 되어 기수가 높아졌을 경우 호르몬 양성 타입이라면 한 약에 내성이 생긴다고 해도 사용할 수 있는 다른 약들의 종류가 다른 두 타입에 비해 비교적 많은 편이기에 생명 연장에 훨씬 이롭다고 볼 수 있다.
예전에 진단받았던 당시 나의 암 타입은 호르몬 양성이었기에 당연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별다른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여러 사례들을 보다 보니 당초의 암 타입과 재발 또는 전이 후의 암 타입이 바뀌는 경우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만약 이 사실을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알았었다면 마음을 졸이느라 안 그래도 약해진 나의 정신 상태가 훨씬 더 휘청였을 텐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당시의 나는 나의 병에 대한 자료를 전혀 찾아보고 있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찾아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상황은 벌어졌는데 이것저것 찾아본들 지금 나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안 해도 될 걱정까지 미리 떠안아 걱정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나의 이 '사실 확인 안 하기' 자세는 오래전 첫 번째 병 진단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진료 시간에 교수님께서 지나가는 말로 '호르몬 양성'이라는 말씀을 하신 걸 듣고는 '아, 나는 호르몬 양성이구나'했던 것이지, 호르몬 양성이라면 그 수치가 어느 정도 되는 것인지, 그리고 호르몬 양성일 경우 치료 종료 후에 어떤 식으로 관리를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하여 일절 신경을 끄고 살았다. 나의 병에 대하여 너무 세세하게 아는 것은 나의 정신 건강에 그리 유익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는데, 이 생각은 반 정도는 맞고 반 정도는 틀렸다고 이제는 생각하는 것이 내 병에 매몰되어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듣는 말들에 혹할 정도로 카더라에 기반한 정보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분명 안 좋은 것이 맞지만, 객관적으로 증명된 자료 혹은 병원의 검사 결과 등을 토대로 나에 현 상황에 대하여 파악할 수 있는 지표들을 확인해 두는 것은 앞으로 내가 스스로를 관리할 때 어떤 기준으로 해야 하는지를 설정하며 경각심을 가질 수 있기에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던 것이다. 전자는 버리고 후자는 내 생활 곳곳에서 기억하고 살아야 했지만 이 경우 내가 환자였고 앞으로도 환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전두엽 어느 한 부분에 강력하게 심어 두고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문제를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당시에는 없었다. 오히려 환자였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앞으로의 내 삶에 훨씬 더 유리할 것이라는 용기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대단히 이 문제를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고, 그 덕분에 지난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나는 내가 환자였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려고 무던히 노력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각종 연구 결과에서 전이성 유방암에 대하여 호르몬 양성 타입일 경우 전이될 확률이 30% 정도라고 밝히고 있다. 심지어 현업에서 환자들을 보는 의료진들의 경우 임상 경험적으로 40~50% 까지도 그 확률을 보고 있는데 이 중요한 사실들을 그저 나의 정신 건강 안위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아예 모르고 살았으니..... 이런 무지한 자가 그래도 이 정도 선에서 병을 발견한 것이 오히려 천운이 아닌가 싶을 정도.
드디어 대망의 진료일이 되었고, 담당 교수님으로부터 나의 암 타입이 호르몬 양성임을 전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암 타입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에 깊은 감사함을 느꼈을 텐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암 타입이 바뀔 수 있다는 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호르몬 양성 타입인 것이 불행 중 다행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바 교수님의 말씀에 별다른 감흥 자체가 없었다. 그저 오늘부터는 일단 치료를 받을 수 있겠구나 딱 이 한 생각뿐이었다.
예전 치료 경험을 바탕으로 당연히 이번에도 혈관 주사로 맞는 항암제를 투여할 것이고, 그로 인해 당연히 머리카락들과도 이별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고 온 것이 무색하게 먹는 항암제를 처방받았다. 그리고 이 약은 환자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주사 항암제를 맞는 것처럼 머리카락이 홀랑 빠지는 부작용은 없다는 설명에 머리카락이 빠질 것을 대비하여 미리 커트도 하고 안 먹어지는 마음 굳게 먹고 온 것이 어쩐지 좀 머쓱했다.
그래, 그렇지. 역시 또 이렇게 나의 예상은 틀리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