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4기다!] - 09.
앞선 글에서 밝혔듯이 나는 유방암 중에서도 호르몬 양성 타입이다.
이 말인즉슨, 내 몸속에서 암이 커지고 있는 것에 호르몬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
하여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치료의 방향은 '내 몸에서 여성 호르몬을 최대한 0에 가깝게 차단하는 것'이다. 아직 폐경이 오지 않은 팔팔한(?) 몸이었던 나는 이 치료 덕분에 신체 기능 나이는 대략 60대 이상으로 훌쩍 건너뛰었다.
청장년기의 정신(굳이 '청'을 붙임으로써 젊어져 보겠다는 욕구를 표출하는 자)에 노년기의 몸을 가지고 있는 나. 고등학생 정신이 초등학생 몸에 갇힌 명탐정 코난의 삶과 비교하여 누가 더 기막힌 인생일까.
암튼, 치료 이후 나의 몸 컨디션 덕분에 내 또래들보다 일찍 부모님 세대, 특히 어머니들이 겪는 여러 가지 신체적인 어려움들을 몸소 체험 중이다. 관절 마디마디가 쑤신다는 것이 이런 것이로구나. 아이고오오.
요즘의 난 하루하루가 대체로 즐겁고 행복한 편이다.
그 모든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살아있으니.
작년 이 맘 때는 걷는 것조차도 뼈가 부러질 것을 염려하여 조심히 걸어야 했고, 그마저도 실은 통증 때문에 걷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는데 죽지 않고 잘 살아서 버티고 있으니 지금은 용산에서 여의도까지 한 번에 주욱 걸을 수 있게 되었으며, 온몸의 통증 때문에 의자는 고사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고통스러웠지만 이제는 몇 시간이고 의자에 앉아서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며 공부를 하고 글도 쓸 수 으니 말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은 지금 내가 아침마다 먹고 있는 약 덕분인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인데, 작년 이 맘 즈음의 나는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약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았었다.
조직 검사 결과가 나오고 나의 치료 방향이 결정된 후부터 나는 '키스칼리'라는 경구항암제와 항호르몬제인 '페마라'를 매일 복용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4주에 한 번 '졸라덱스'라는 난소 억제제, 암세포의 활발한 공격 덕분에 구멍이 숭숭 뚫린 뼈의 재건을 위한 '엑스지바'까지 주사제로 맞는 중이다.
주사는 병원 갈 때마다 맞는 것이니 '병원에 가면 으레 하는 것이려니' 정도로 애써 가볍게 생각할 수 있었지만 매일 복용하는 약은 내 마음속에 놓이는 포지션이 달랐다. 다시 환자가 되었다는 것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속 어느 한편에서 끊임없이 부정과 회피를 하고 싶었는데 매일 아침 복용해야 하는 이 약들은 나를 끊임없이 "너는 환자다"라는 것은 상기시켜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날은 약을 넘기는데 냄새가 너무 난다며 약을 타박하기도 했었고, 또 어느 날은 약을 손에 쥐고 서러운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었다. 소소한 크기의 약 몇 알 따위가 내 인생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이 기가 막혔고, 약으로 연명하는 인생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대학원 다음 학기 개강을 준비하며, 학기 중에는 듣지 못했던 외부 교육을 듣겠다며 교육 신청을 하고 있었던 사람이 한순간에 이 세상에서 아무런 쓸모도 없는 사람으로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생각에 '이런 내가 약으로 그깟 생명 얼마간 더 연장을 하는 것이 나의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우울한 생각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들 덕분에 매일 아침 약을 먹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비루해진 인생 뭐 더 살아보겠다고 이러고 매일 아침 약을 먹는 나는 참.....
지금 현재 상태에서 작년 이 맘 즈음 내가 했던 생각들을 복기해 보면 배가 불러도 한참을 불러서 급기야는 어디 한 군데 터지는 소리들의 연속이다.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 속에 있다 보니 그 시절의 약해진 내가 할 수 있는 생각들이라 애써 정신 승리를 돌려보긴 하지만 어쨌든 그 시기의 나는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완벽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조건 기를 쓰고 살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 지금 당장은 비루해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약을 붙들어야만 앞으로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 가끔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무거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악착같이 붙들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앞으로 내게 어떤 가능성을 열어줄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내가 먹는 약을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약을 먹어도 그 효과가 그리 좋지 못해서 약을 바꿔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에 비해 나는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약발 기가 막히게 잘 듣는 몸 덕분에 이 좋은 약의 효과가 몸에서 잘 나타나고 있고 그 덕에 작년 이맘때는 늘 함께였던 마약성 진통제와도 안정적으로 이별할 수 있었다. 몸에서 느껴지던 그 미칠듯한 암성통증이 이제 거의 대부분 사라진 마당에, 내가 잠시 잠깐이나마 이 좋고 귀한 약을 마음으로 홀대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눈앞이 아찔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요즘은 매일 아침 약 먹을 때마다 약들에게 손뼉 치며 감사인사까지 하고 있다. 작년에 마음으로 홀대했던 것을 이런 식으로라도 갚아보겠다는 나름의 의식이라고나 할까. 오늘 하루도 잘 부탁한다며 갖은 깨방정과 함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약들을 삼키고 나면 어쩐지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를 또 한 번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힘도 나게 해주는 것 같다.
약들로 인하여 어쩔 수 없게 겪게 되는 각종 부작용들은, 이제는 확실하게 '이것은 내 몸에서 약이 잘 듣고 있다는 신호'라 여기고 있다. 허리, 무릎 좀 아프고 쑤시면 어떻고 머리카락 이거 좀 빠지면 어때. 머리카락 빠지는 것이 감당이 안 될 정도면 예쁜 가발 하나 사서 쓰면 그만이고, 관절 여기저기 아픈 건 운동하고 잘 달래가면서 살면 그만이지.
중요한 건 내가 현재 잘 살아서 버티고 있다는 것이니 이 생각만 놓지 않고 잘 붙들고 있으면 된다.
키스칼리야, 페마라야, 졸라덱스야, 엑스지바야! 나 살게 해 줘서 정말 고맙다!
앞으로도 그저 지금 정도만 잘 유지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