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4기다!] - 11.
충격과 공포였던 전이 진단을 받은 지도 어느덧 2년을 향해 달리고 있다.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어린 시절에 비해 새로울 것이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요즘의 나는 내 앞에 펼쳐지는 것들이 어떤 것들 일지에 관하여 도통 예상조차 할 수 없는 드라마틱한 인생을 보내고 있다 보니 적어도 내 또래들보다는 하루의 길이를 좀 더 길게 느끼며 살고 있다는 점에서만큼은 이 얄궂은 병이 확실히 나쁘지만은 않다(?).
하지만 내가 편안한 마음으로 이 병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로 '4기 유방암'이라는 존재감 확실한 이 병은 치료 전과 후의 나의 삶을 극명하게 바꾼 것들이 분명히 있다. 초반에는 이런 이유 때문에 마음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곧 인생 마무리하는 사람처럼 굴었었는데 지금은 그저 '예전에 비해 좀 불편해진 점' 정도로 정의하며 잘 달래며 살아보자 생각하고 있다. 사실 '좀 불편해진' 정도가 아니긴 하지만, 이 부분을 붙들고 '왜'를 암만 생각해 봐야 정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어서 그럴 바엔 그냥 수용하는 편이 앞으로 내가 살아감에 있어 훨씬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중이다.
그럼 예전과 비교하여 4기 유방암 환자의 삶을 살고 있는 지금 어떤 것들이 '좀 불편하게' 변한 것인지 나열해 보기로 한다.
1. 체력 무슨 일?
예전에도 체력이 뭐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나이에 맞는 수준 정도는 지켜왔던 것 같은데 다시 시작된 항암 치료는 가장 먼저 나의 체력을 급격히 떨어뜨렸다. 치료 초반에는 그 정도가 정말 심했어서 외출을 하든 공부를 하든 2시간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었다. 이를 두고 내 동생은 "게임으로 비유해 보자면 누나는 예전에 비해서 HP가 확 줄어들었는데 그 와중에 일반 공격에도 크리티컬 대미지를 맞는 것이라 생각해야겠다"라고 표현했는데 다시 생각해 봐도 이거 정말 찰떡인 비유다.
그래도 지금은 몸이 많이 적응을 한 것인지 치료 초반만큼 골골대며 지내지는 않는다. 1km를 30분 이상 걸려서 겨우 걸을 수 있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치료 전 컨디션과 비슷한 수준인 15분 안으로 걸을 수 있는 것이 그 방증이리라. 그런데 이렇게 되니 또 발생하는 소소한 문제는 '체력에 비해 의욕이 가끔 넘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체력이 조금조금 올라오던 어느 날, 신난다고 용산에서 집까지 걸어보겠다고 호기롭게 걷다가 실시간으로 깎여나가는 HP를 느끼고는 식겁했던 경험이 있어서 말이지. (용산에서 집까지는 대략 4km 정도다.) 뭐든 적당히 하면 되는데 나는 매번 그 '적당히'가 잘 안 된다.
2. 갱년기 어서 오고~
내가 현재 처방받고 있는 항암 관련 치료제들 중에는 여성 호르몬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약물들이 있다. 나의 유방암 유발 요인은 압도적인 수준으로 여성 호르몬이기 때문에 암의 증식을 막기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조치이다. 이렇게 강제로 여성 호르몬을 몸에서 모두 퇴출(?)시키게 되면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이 바로 "갱년기"이다.
사실 갱년기는 여성이라면 반드시 겪고 지나가야 하는 것이고, 그 시기는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빠른 사람은 40세부터 시작된다고 하니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일찍 갱년기를 맞이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만, 이 얄궂은 갱년기는 단순히 월경 중단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어서 사람에 따라 아주 다양한 증상들을 수반한다. 요즘 내가 겪고 있는 증상들 중 가장 불편한 것은 몸의 모든 관절들이 아프다는 것이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약했던 양쪽 발목 관절과 더불어 생전 아파본 적 없었던 무릎 관절까지 다리 쪽 관절들이 모두 속을 좀 썩이고 있는 상황. 뼈로 전이된 암세포들이 고관절을 아주 신명 나게 고장 내놓더니 갱년기 증상으로 무릎에 이어 발목까지 다리 관절들이 아주 그냥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때문에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내는 "아이고오오~"하는 소리는 기본값.
관절들이 속 썩이는 것 말고는 비교적 소소한 편인데, 땀이 예전에 비해 많이 나는 것과 이따금씩 밤에 잠이 잘 안 온다는 것 정도? 땀은 확실히 여름이 되니 좀 많이 불편하긴 한데 손수건 챙겨 다니면서 해결하면 되고 잠 안 오면 책 읽거나 TV 보면 되니 생활이 안 될 정도의 불편은 아닌 것 같긴 하다.
3. 손대면 톡~ 하고 부러질 수도 있는 뼈?
뼈는 전이 진단 직후부터 계속 조심하고 있는 부분이다. 애초에 전이가 뼈로 가장 세게 오기도 했고, 에스트로겐이 우리 몸속에서 하는 주요 역할 중 뼈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 있는데 나는 현재 그걸 원천 차단하고 있으니 자연히 뼈가 약해질 수밖에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치료 초반에는 담당 교수님께서 "운동하려면 그냥 살살 걸으세요. 뼈 부러지면 치료하기 굉장히 힘들어집니다."라는 말을 진료 때마다 하실 정도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4주에 한 번씩 뼈주사(엑스지바)도 맞고, 뼈 건강을 위한 칼슘제와 비타민 D를 함께 복용하고 있다.
4. 치과를 못 가다니
위에서 이야기한 뼈주사와 관계된 것으로, 이 뼈주사를 맞는 동안은 치과 진료를 보는 것이 제한된다. 엑스지바의 주요 부작용이 턱뼈 괴사가 있기 때문이란다. 치과 치료 말고 스케일링은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담당 교수님께 여쭤봤더니 "치과 방문 한 달 전부터 엑스지바 주사를 중단해야 하는데 엑스지바 중단과 치과 진료 중 어느 것이 본인에게 더 유익한 것인지 이해득실을 잘 따져야 할 것 같아요"라는 답변을 받고는 엑스지바를 맞고 있는 동안은 '치과는 내가 알지 못하는 병원'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대신 치과를 못 가니 칫솔은 좋은 걸 쓰자 싶어서 다소 비싼 편이어도 써본 것 중 가장 확실하게 시원한 느낌을 줬던 칫솔을 쓰고 있다. 워터픽도 하고 가글도 해야 하는데 이건 참 습관 붙이기가 쉽지 않다.
5. 본능에 매우 충실한 삶
원래 나는 '배고픔'에 매우 강한 타입이었다. 식사 때가 되었더라도 내가 무언가에 몰두해 있거나 끝내야만 하는 일이 있으면 배고픔을 잊고 할 일을 끝내는 것을 우선에 두는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도통 그럴 수가 없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의욕은 전이 진단 이전 수준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식사 시간을 넘겨서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이제는 어느 수준 이상으로 에너지를 소진했다 싶으면 바로 몸에서 반응이 온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두통. 배고픔은 못 느끼고 넘어갈 수도 있는데 두통이 시작되면 '아 내가 또 에너지를 제대로 채워 넣지 않은 상태로 달리고 있구나'를 깨닫게 된다. 이때 얼른 뭐라도 먹어줘야 하는데 만약 시간이 지체되면 하루종일 극악의 두통을 경험해야 한다.
6. 아침을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하는 귀차니스트
부모님 밑에서 생활할 때는 아침을 반드시 먹어야만 했지만 독립 이후로는 아침을 챙겨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파이팅을 외치는 노래에서도 그러지 않았나. 10분 더 자기 위해서 아침밥은 패스한다고.
그러나 전이 진단 후부터는 아침을 반드시 챙겨 먹는다. 그것도 아주 든든히. 이유는 지금 먹고 있는 항암제 때문인데, 표적치료제인 '키스칼리'는 치료 효과가 아주 좋은 약인데 딱 하나 내가 겪었던 꽤나 큰 부작용은 빈 속에 약을 먹으면 굉장한 오심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부작용 발현은 제각각이지만 나에게는 이 부작용이 거의 유일했다.) 약 복용 초반에는 입맛이 말도 안 되게 사라져 버려서 음식 먹는 것 자체가 굉장히 고역이었는데 그 와중에 오심까지 오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 이후부터는 오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침은 대단히 든든하게 잘 챙겨 먹었다. 아침부터 소고기를 구워 먹었을 정도니.
지금은 진단 초반처럼 입맛이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아서 음식을 먹는 것에 힘든 점은 없는데 정해진 시각에 약을 먹기 위해서는 정해진 시각에 일어나 밥을 먹어야 해서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이게 근데 목숨과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귀찮은 것 정도는 가뿐하게 이겨내더라. 역시 인간의 잠재력이란.
아마도 위에서 언급한 것들 말고도 소소하게 불편을 느끼는 것들이 있긴 했을 텐데 말 그대로 '너무 소소해서' 장기 기억에까지 남기지는 않았나 보다. 더 있나 싶어서 떠올려보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늘 생각했던 것이긴 하지만 요즘 특히 더 생각하며 살게 되는 점은 "안 좋은 점이 있으면 분명 좋은 점도 있다"는 것이다. 비록 나에게 찾아온 이 병이 위에 언급한 것들을 필두로 갖가지 힘든 점들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어떻게 마음을 먹는지에 따라 좋은 점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여 다음번에는 이 병 덕분에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커밍 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