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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나 Aug 11. 2023

가족: 채찍에 숨겨진 뜨끈한 사랑

[이번엔 4기다!] - 3.

나는 가족과 '묘하게 잘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를 제외한 부모님, 그리고 한 살 터울의 남동생은 서로 간의 부딪힘은 있을지언정 비슷한 결의 무언가가 느껴졌는데 난 그런 지점에서는 영 다른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렇다 보니 "도대체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라는 말을 기본값처럼 듣고 살았는데, 가족들의 저 말이 마냥 억울하지만은 않았던 것이 솔직히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몰라서 내 속에 있는 것들을 표현해 내기가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

내 기준에서는 직접적으로 표현을 잘 하는 가족들이 때로는 상처가 될 때도 있었지만,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 그런 가족들이 부럽기도 했다.


나도 이들과 가족임에는 분명한데 대체 왜 나만 이렇게 별종처럼 다른 것일까.

그리고 난 왜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일까.

혹시 내가 어딘가 부족한 것은 아닐까.


어지간한 마음이었다면 이 정도의 부정적인 필터를 장착한 채 스스로를 바라봐왔다면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주아주 다행히도 나는 그렇게(??) 흘러가기에는 나 스스로를 꽤나 많이 사랑하는 인간이었던 것 같다.

하여... '가족들보다 내가 못났다'가 아니라 '우리 가족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일정 정도 마음의 문을 잠근 적당한 수준으로 가족들을 대했다. 첫 번째 생각보다는 차라리 두 번째 생각이 나를 지키는 데는 용이했지만 이 두 번째 생각 덕분에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가족들을 제대로 믿지 못하게 되었다.


해결되지 않은 마음의 숙제는 결국 날 MBTI 공부를 하게 이끌었는데 놀랍게도 이 공부 덕분에 나는 가족들을, 그리고 가족들은 나에 대해서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와 우리 가족들은 '상황에 대한 판단을 할 때 선호하는 방법'에서 결정적으로 확연한 차이가 났다. '공감과 배려'로 대표되는 '감정형(F)'이었던 나와 달리 우리 가족들은 '문제 해결'이 핵심 키워드인 '논리형(T)'이다 보니, 갈등이 야기되는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일단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마음을 안아주고 보듬어줘야 한다'라고 내가 생각할 때, 우리 가족들은 '공감은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에 해도 늦지 않다. 일단은 문제 해결이 급선무다'를 외치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찾기에 몰두하는 것이다.

내 시선으로 봤을 때 우리 가족은 '너무 몰아세우는 버거운 사람들'이었고, 가족들 시선으로 봤을 때 나는 '무슨 일이 생기면 얼른 해결할 생각은 안 하고 울기나 하는 답답한 사람'이었다.




이 와중에 우리 가족들은 모두 말이 정말 정말 많은 편이다.

지난 어느 명절에는 부모님 댁에서 동생과 엄마, 그리고 나까지 셋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엄마는 새벽 2시 정도에 주무시러 들어가시고 동생과 나는 새벽 4시까지 더 떠들다가 "이렇게 있다가는 동트고 나서의 생활이 안 되겠다"라며 자러 들어갈 정도.

명절이니 오래간만에 만나서 그럴 수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 요즘도 가끔 내가 동생 네로, 혹은 동생이 우리 집에 놀러 와도 집 도착하면서부터 문을 나설 때까지 몇 시간이고 대화가 끊이지 않는 걸 보면 우리 가족은 그냥 기본적으로 대화의 주제와 양 모두 많은 사람들인듯 싶다.

이렇게 대화가 많은 덕분에 '서로의 다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기회가 굉장히 많았고, 다행히 우리 가족들 모두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들이라 MBTI 결과를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부모님과 동생을, 부모님과 동생은 나를 꽤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가족들을 이해하고 보니 내가 가족들에 대하여 한 가지 확신을 가지게 된 점은 '해결해야 할 상황이 생겼을 때 가족들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길이 보인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공감을 먼저 해주고 방법을 제시해주면 얼마나 좋으려냐만은... 이런 공감 타령이나 하고 앉아있는 내가 우리 가족들 입장에서 답답해 보이는 건 매한가지일 테니 이 부분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으로.




동생은 '30살 이후의 누나는 내가 인간 만들었다'라며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데, 나 역시 크게 인정하는 바다.

이걸 인정하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내가 동생 조언을 들어서 안 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안 좋았던' 게 아니라 '훨씬 더 좋아졌다'라고, 더 극적으로는 '날 살렸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2022년 8월의 그날, 동네에 있는 큰 정형외과를 가보게 된 계기도 따지고 보면 동생 덕분이었다.

몸의 이상을 본격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던 것은 2022년 5월부터였는데, 회사 근처에서 수개월째 받고 있던 고관절 통증 치료가 영 신통찮음을 동생과 ZOOM에서 이야기하던 중 흘러가듯 슥 언급했는데 '몇 개월을 치료받으면서도 별 차도가 없으면 병원을 옮겨야지 그 무슨 미련한 짓이냐'라는 핀잔을 듣고는 아차 싶어서 얼른 동네 병원을 예약했던 것이 지금의 이 어마어마한 상황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큰일 난 것 같다는 나의 톡에 득달같이 동생의 답 연락이 왔다. 사실 이 소식을 듣기 전에는 그저 '갈비뼈에 혹이 하나 있는데 이건 그냥 흔하게 생기는 것이니 먼저 이 혹을 제거하고 오라'라는 말을 들었고 이 내용을 동생한테 전했던 터라, 근처 다른 큰 병원에 가서 이 혹을 제거하기 위한 다른 진료를 보는 줄로만 알았던 동생 역시 나의 큰일 언급에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동생이 누군가.

우리 가족 중 가장 강력한 T를 갖고 있으며 '누구보다 빠른 문제 해결'을 선호하는 자가 아니던가.

세상 그 누구보다 빠르게 '지금 누나에게 닥친 문제 해결 대작전'을 머릿속에서 세우고 있는 것 같았고, 나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이내 알 수 있었다.

근무 중이었던 동생은 하던 일도 접어두고 '1. 지금 누나에게 가장 좋은 병원을 파악하여 결정한다'를 가장 먼저 해결하기 시작하더니 '2. 부모님께 이 소식을 알린다'를 해결하기 위하여 운동하러 함께 오붓하게 출타하셨던 부모님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 가능하시면 지금 바로 귀가하셔서 집 도착 후에 전화주시라"라며 연락을 드렸다. 많이 놀라신 어머니께서 대체 무슨 일인지 지금 당장 이야기하라고 채근하셔도 "큰일은 아니니 이따 집에 도착하시면 말씀드릴게요"라며 짐짓 의연한 자세로 넘기기까지.

부모님의 귀가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동생은 쉬지 않았다. 곧바로 '3. 2학기 수강은 어려울 것 같으니 대학원 휴학을 해야 되지 않겠냐'라는 주문이 들어왔고, 눈물 콧물 쏟아가며 휴학 신청을 마치고 나니 '2-1. 부모님께는 누가 말씀드릴 것인가'를 결정하자고 하였다. 보나 마나 나는 우느라 해야 할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동생에게 부탁하였고, 평소 같으면 '네 문제는 네가 해결하라'라고 했을 텐데 내 상태가 그럴 만하지 않다고 동생도 판단했는지 알겠다며 수락했다.

뒤이어 귀가하신 부모님께 연락이 왔고, 동생은 최대한 담백한 어조와 내용을 담아 내 소식을 부모님께 전했다.


부모님께까지 내 소식이 당도하고 나니 내 마음속에 있던 무언가가 크게 한 번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 우리 부모님은 무슨 죄가 있어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자식의 아픈 소식을 들으셔야 하는 건가 싶고, 내 비록 불효하려고 일부러 작정하고 병에 걸린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을 또다시 마주하게 만든 것이 한없이 죄스러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물 펑펑펑은 당연히 기본 옵션.


그러나... 역시 우리 가족.

엄청난 문제 상황에 직면하니 동생 못지않게 T가 강력하게 발휘되는 어머니와 아버지.

아마도 부모님 두 분은 지금 이 상황에서의 문제 해결 방법을 '딸이 병원 진료 보기 전까지 마음 무너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으로 잡으셨는지 평소보다 훨씬 더 파이팅이 넘치셨다.

계속 눈물 흘리고 있던 내가 머쓱해질 만큼.




사실 각자가 생각하는 '문제를 대하는 방식과 우선순위'가 다를 뿐, 이런 상황에서는 각자의 성향이 어떻든지 간에 비슷한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내 입장에서는 '병원 예약'이라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이미 해결해뒀으니 F를 적극 발휘하며 정신줄도 좀 놔보고 울기도 하면서 일단은 나의 힘든 마음을 스스로 좀 알아주고 위로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던 반면, 동생의 입장에서는 병원 예약 외에도 지금 당장 처리해야할 것들이 많으니 일단 그런 것들을 먼저 빠르게 잘 처리한 후에 마음을 들여다봐도 늦지 않다는 것이었을 터.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힘든 문제를 빠르게 해결해야 하는 상황일수록 나같이 생각하며 처리하는 방법보다는 동생처럼 생각하며 일에 접근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일의 결괏값도 좋다.

그리고 나 같은 성격의 사람에게 이때 당시 누군가 위로와 공감을 해주며 토닥였다면... 아마도 며칠 동안은 정신 못 차리고 세상 제일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 마냥 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우리 가족들의 이 강력한 T 성향은 나를 비교적 빠르게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이날, 부모님과 동생과의 모든 연결이 종료되고 난 후에는 나도 정신 차려서 저녁밥 챙겨 먹고 TV 예능 프로그램 보면서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어쩐지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들이 감정도 없는 사람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때는 나도 이런 식으로 가족들의 마음을 오해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나이를 이만큼 먹고 가족들과 이래저래 부딪혀보고 나니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나와의 연결이 종료되고 난 후에 부모님과 동생 모두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마음 아파하고 힘들어했을 것이란 점이다. 부모님과는 통화를 종료하고 난 이후에 부모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직접 보지 못했기에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우리 가족들 중에서 T가 가장 강력한 동생이 ZOOM 연결을 종료하기 전 나 때문에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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